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디지털 전환 시대, 인문학 혁신의 조건과 가능성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인문학자조차 이러한 문제 제기가 타당한지 의문을 품는 시대이다. 인간의 삶에서 지금처럼 경제를 제대로 알고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었을까 싶다. 이러한 변화는 인문학만이 오롯이 인간 존재와 세계 인식의 문제를 독식하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인문학만의 홀로서기는 불가능하다. 자조적으로 위기론을 읊조리기보다는 인문학의 경계 밖에 자리한 학문과의 ‘융합’ 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혁신’을 모색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3월 30일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카이스트가 공동으로 개최한 ‘디지털 전환 시대, 인문학 혁신의 방향’ 학술회의는 시의적절하고도 뜻깊은 공론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오간 논의를 인문학자 관점에서 ‘인문학 혁신의 조건과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문학 혁신의 조건
1960년대 한국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이래 대학교과 학문에서 자연과학과 공학, 즉 이공계는 재원과 규모 면에서 인문사회계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그것은 대학교 경영과 학문 연구에서 경제성·효율성 논리가 제일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에 들어와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면서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는 국가 R&D 예산 비율에서 99% 대 1%라는 수치가 보여주듯이 극단적인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국가 R&D 예산은 19조 4,615억 원에서 27조 4,005억 원으로 늘어나 연평균 8.9%씩 증가했다. 반면 문과, 즉 인문·사회계의 국가 R&D 예산은 3,064억 원에서 3,226억 원으로 162억 원이 늘어나 연평균 증가율은 1.3%에 불과했다.
오늘날 대학교는 산업화 시대에 수립된 대학교 정책과 대학교 경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수익성을 좇는 방향으로만 ‘개혁’을 거듭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문사회계 학문이 위기에 처한 것은 정부가 균형적 학문 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산업화의 안목으로 ‘돈 되는’ 학문에만 재원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탈산업화의 시선에서 인문사회계와 이공계 간의 균형 있는 학문 발전을 도모할 때인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우선적으로 고사 상태에 놓인 인문사회계를 살려야 한다. 인문사회계에 대한 ‘심폐소생술’은 법과 조직과 제도 마련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먼저 국가의 인문사회계에 대한 학술 지원 책무를 규정하고 학술정책의 수립과 실행을 보장하는 ‘기초학술기본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둘째, 인문사회 학술정책의 수립과 실행을 담당하고 학술 성과를 시민사회에 환원하는 (가칭) 인문정책연구원 등의 조직이 설립되어야 한다. 셋째, 인문사회계 학문후속 세대 양성을 위한 인문사회학술 연구교수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 독일의 막스 플랑크 협회(Max-Planck Society)나 프랑스의 CNRS처럼 수천 명 규모로 선발된 학술 연구 교수들이 지역별 대학교 네크워크 등을 활용해 개인 연구와 집단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정부가 법과 조직과 제도를 마련해 인문사회계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양성되도록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 혁신의 기본 요건이다.
지난 3월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KAIST가 공동 주최한 「디지털 전환 시대, 인문학 혁신의 방향」 심포지움
인문학 혁신의 가능성
인문학의 혁신은 내적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선도에 의한 혁신도 가능하다. ‘신한국 인문학’ 제안은 인문학 스스로의 성찰에서 발원한 혁신 방안이다. ‘신한국 인문학’은 전통적인 한국학에 방점을 둔 인문학이 아니며, 한국 인문학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한국다움(Koreanness)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인문학을 극복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인문학 연구와 교육을 위한 새로운 접근이며 새로운 요구와 환경에 부응하는 인문학 진흥책으로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한다. 구체적으로 ‘신한국 인문학’은 ‘자의식을 통한 우리 고유함이 갖는 보편성의 발견’으로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우리 이해의 패러다임이자 세계 시민의 공유기반이 될 수 있는 인간 이해와 가치 체계의 패러다임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인문학 내부로부터의 혁신을 추구하는 ‘신한국 인문학’은 디지털 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혁신 공유 대학교 모델을 구상한다. 인문사회계는 정부에 인문사회에 대한 학술정책 수립을 요구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문사회계와 이공계의 융복합 연구와 협업의 시급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공계 역시 인문학과의 융합에 기반한 발전과 도약을 꾀하면서 인문학 혁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디지털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한 혁신을 추구하며 그에 기반한 ‘21세기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카이스트는 2023년에 디지털 인문사회과학대학원을 연다. 디지털 인문사회과학대학원은 포스트 AI 시대에 새로운 지식 및 연구 분야를 개척해야 하는 필요성과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부응한 인문사회과학분야의 혁신 요구 등에 기반해 ‘인문사회과학 고등인력을 대상으로 한 융합 석박사 학위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인간-사회-예술 분야에 대한 디지털 분석 역량을 갖춘 인문융합공학자 양성’ 을 목표로 한다. 연구 측면에서는 이공학적 방법론의 도입과 적용을 통해 답보 상태에 놓인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질적 도약을 모색하고자 한다. 산업 측면에서는 인문융합공학 인력 공급을 통해 국내 IT 산업계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디지털 인문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이라는 이공계 연구 중심 대학교의 선도적인 행보는 인문학의 안팎 경계를 허물며 인문학의 혁신을 이끄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다. 이공계가 나서 인문학의 혁신을 견인하고 선도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과학기술기본법」 제2조의 기본 이념을 살펴보자. 이 법은 과학기술 혁신이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자연환경 및 사회윤리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고 경제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며 과학기술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존중받도록 하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 서로 균형적으로 연계해 발전하도록 함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 이처럼 2001년에 법조문으로 명시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균형적인 연계를 통한 발전’은 인문학 혁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디지털 전환 시대를 맞아 현실적 요구가 되어가고 있다. 인문사회계 혹은 이공계, 누가 인문학 혁신을 선도할 것인가’라는 다툼이 의미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김정인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2022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