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 2023년도 제3차 인문관통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

심민영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 2023 여름호

트라우마는 극도로 위협적이거나 끔찍한 사건으로, 정신의학적 관점에서는 생명의 위협, 심각한 위해, 성적인 폭력과 관련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커다란 고통 중 하나이다. 미국 등 해외 연구에서는 70~80%의 사람들이 평생 한 번 이상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소수의 특별한 불운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닥칠 수 있는 불청객이다. 그중에서도 집단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 또는 사회 전체에 심리적 충격을 유발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건을 말한다. 대형 재난, 전쟁, 테러, 인종 학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사건에 직접 휘말리거나 간접적인 노출을 통해 공통적인 충격과 상처를 받는다. 홀로코스트는 가장 잘 알려진 집단 트라우마 중 하나로 역사와 인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2011년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 역시 미국 전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2015년 국내의 한 언론사가 광복 이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조사했는데, 한국전쟁, 세월호 참사,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다.

집단 트라우마의 특징

집단 트라우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진 전쟁, 지진 등의 참상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며, 각종 모바일 기기는 참혹한 영상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참혹한 비극을 목도할 때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은 충격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구성원들의 기억에 남고, 사건과 관련한 상황이나 자극에 의해 다시 꺼내어진다. 집단의 정체성이 손상되면 부정적 기억은 더 오래 지속되는데 사건을 직접 겪은 세대를 넘어 후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 르완다, 보스니아, 캄보디아 등 대량 학살 생존자의 자녀들을 조사한 연구들에서 집단 트라우마 이후에 태어난 자녀들에게서 불안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이 대조군보다 유의하게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우울과 불안은 사고방식, 행동 패턴, 감정을 통해 자녀에게 전달된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부모는 자녀를 과도하게 보호하거나 과잉 감정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모의 결핍을 충족시키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모와 자녀 간의 안정적인 애착 형성을 어렵게 하고 자녀의 정서적 문제로 이어진다. 몇몇 연구에서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자녀에게서 생물학적인 변화를 보고하고 있다. 스트레스 조절 중추인 뇌하수체 중심의 내분비 체계 교란이 관찰되는데 이로 인한 만성적인 코르티솔 저하는 면역기능 저하, 심혈관 질환, 당뇨병, 염증 증가와 같은 신체적인 질환을 야기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에서 유전자 염기서열의 변화까지 보고되어 트라우마의 대물림이 생물학적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집단 트라우마는 과거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회의 관심과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집단 트라우마의 영향

트라우마는 우리의 신념과 가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위협에 맞닥뜨리고 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말 안전한지, 주변 사람들을 믿어도 되는지, 나 자신과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게 된다. 집단 트라우마는 이에 더해 집단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던진다. 불안에 휩싸인 공동체 안에는 각종 루머와 혐오가 만연하며 갈등과 분열이 발생한다. 역사적으로감염병 대유행 때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혐오가 증가했던 사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유대인과 집시가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루머의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고, 매독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각 국가에서는 적대국의이름을 본따 병명을 붙이기도 했다.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각 국가에서 이방인 혐오(Xenophobia)가 만연했고, 몇몇 국가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격히 증가하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집단이 구성원에게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가치감을 떨어뜨리고 집단의 정체성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한다.

반면 집단 트라우마가 결속력을 더 강화시키는 사례도 있다. 공통의 상처를 경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공감과 상호 지지가 이루어지고 연대감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속력과 유대감은 역경을 이겨내는 동력이 된다. 또 역경의 극복이라는 과업에 집중하게 되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유토피아적 효과도 나타난다. 기존의 각종 제도와 정책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구성원들은 정부와 사회기관에 개선을 요구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한다. 위기관리 체계가 개선되며 미래의 위험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단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회에서 정의와 혁신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구와 노력이 증가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집단 트라우마의 회복

역경의 극복은 사회적 자본에 달려있다. 공동체 복원은 개인과 집단, 사회, 환경 등이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실질적인 지원과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고 공통의 의미와 이해, 규범과 가치가 공유되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자원 배분이 중요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신뢰, 집단의 규범, 다양성과 가변성에 대한 존중과 같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 커진다. 공동체를 신뢰하는 사회는 구성원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한다는 인식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피해를 본 구성원이 보호받고 모두가 힘을 합쳐 역경을 극복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루머와 혐오를적극적으로 경계하고 이들이 고립되거나 모욕당하지 않도록 보호할 때 당사자는 강력한 사회적 지지를 경험한다. 당사자의 회복이 촉진될 뿐 아니라 전체 구성원의 사회적 신뢰가 강화된다. 누구라도 곤경에 처할 때 집단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이 튼튼한 사회는 역경 앞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결속력과 유대감을 강화해 나간다. 이를 통해 집단이 가진 잠재력과 효능감이 강화되고 긍정적인 집단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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