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를 위한 제언
2021년에 돌아보는 조선 건국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국가는 민(民)에 의존한다. 따라서 민은 국가의 근본이요,군주의 하늘이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흔히 반만년 역사라고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고조선 건국 이후 3000년 정도로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미국은 물론이고 소위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유럽 국가보다 역사가 훨씬 더 길다. 왕조의 수명 또한 길었다. 고려와 조선은 500년 안팎, 고구려·백제·신라는 10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한국사에서 왕조가 교체된 것은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두 번밖에 없었다. 또 외부 세력의 정복에 의한 왕조 교체가 없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멸망에 이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 교체는 철저하게 내부의 문제로 진행되었다. 즉 신라 사람들이 고려를 세웠고, 조선을 건국한 것 역시 고려 사람들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왜 자기 나라의 문을 닫고 새 왕조 조선을 개국했을까?
고려 말의 세 가지 위기
14세기 후반, 고려왕조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첫 번째 위기는 원-명 교체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했다. 명의 철령위 설치와 고려의 요동 출병은 외교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위기는 불교-유교 교체에 따른 사상적 충격이었다. 고려후기에 수용된 성리학은 “불교는 이단이며, 이단은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고려 불교계는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 실패가 성리학을 앞세운 새 왕조 개창의 빌미가 되었다.
세 번째는 폭정이었다. 무신정권, 몽골과의 전쟁, 원의 간섭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고려는 오랫동안 개혁의 기회를 갖지못했다. 각종 제도는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고, 낡은 제도 위에서 집권 세력은 부패했으며, 그 피해는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토지와 노비, 두 측면에서 나타났다. 특히 토지문제가 심각했다. 권력자들이 드넓은 농장을 만들면서 백성들의 땅을 빼앗은 것이다. 농장을 경작할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이번에는 양인을 억지로 노비로 만들었다. 모두가 불법행위였다. 경작할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거나 스스로 권력자의 노비가 되었고, 도적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이 현실을 ‘국지불국(國之不國)’, 즉 “이게 나라냐!”며 개탄했다.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왕은 전격적으로 반원운동을 일으켜 원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곧바로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공민왕이 반개혁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로 폭정은 공민왕 이전보다 더 심해졌고, 고려 왕조는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정도전의 등장
정도전(1342~1398)은 공민왕 때 20대의 신진 관료로서 개혁 과정을 목격했다. 공민왕 암살 후 반대파에 의해 개혁의 성과가 부정되는 것을 보고 동료들과 함께 저항했고, 그 때문에 나주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지켜보면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의 인생에서 이른바 ‘민의 발견’이라고 평가받는 대목이다.
유배에서 풀린 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며 명장으로 성가(聲價)를 올렸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서 건넨 첫마디는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였다. 만남 이후 이성계는 정치의 길로 들어섰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오른팔이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개혁이 재개되었다. 토지개혁이 가장 먼저였다. 이때는 공민왕의 개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좀 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수조권의 불법 행사를 금지한 것이었다. 개혁세력은 제도를 고쳐 불법적인 수조권 행사를 근절하고자 했다. 그런데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비록 불법이지만 오랜 관행이라는 논리였다. 오랫동안,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기에 불법행위에 대한 죄의식도 없었다. 이렇게 고려왕조의 위기는 모르는 사이에 누적되고 있었다.
민(民)이 근본인 나라를 만들자
토지개혁이 성공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로 과전법이 제정되었지만, 정도전은 그 개혁이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토지가 없어서 남의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더 근본적인 개혁을 구상했다. 즉, 국가의 모든 토지를 공전(公田)으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농민이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조세로 낸 나머지 10분의9로 먹고살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에는 토지 공개념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도전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민본(民本), 즉 민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을 연장해서 정도전은 ‘군주가 민심을 잃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민심을 잃은 고려왕조를 민이 버려야 한다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이러한 혁명론(革命論)을 바탕으로 조선이 건국되었다. 뒷날 정도전은 군주와 국가와 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따라서 민은 국가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다.” 조선은 14세기 후반 원-명 교체, 불교-유교 교체에 대응해서 친명(親明) 노선의 성리학 국가로 탄생했다. 또한 민본사상을 앞세워 고려 말의 폭정을 몰아내고 건국한 나라다. 고려 사람들은 나라를 바꾸는 거대한 혁신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다. 혁신이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2021년에 조선 건국을 돌아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