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 더위는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느지막이 찾아온 가을을 지나 서늘한 바람이 차가운 기운으로 바뀌어 우수수 우수수 떨어진 낙엽을 흩어낼 즈음이면 산과 들 그리고 내가 자주 걷는 수목원 길엔 하얗게 피어난 억새가 일렁입니다. 아름답고도 쓸쓸하고 애잔하게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많은 이들이 “억새가 피었다”라고 말하는 이즈음은 억새꽃이 지난 후입니다. 우리가 보는 수염처럼 허연 억새의 꽃은 정확히 말하자면 바람을 타고 흩날릴 씨앗에 털이 가득 달린 열매이지요. 억새는 여름이 끝날 무렵 꽃대를 내밀고 가지 겨드랑이 사이에서 붓처럼 뾰족하고 둥글게 말린 꽃들이 삐죽 고개를 내밉니다. 그러다 햇살이 좋은 어느 가을날, 이 꽃들이 술처럼 퍼지며 피어납니다. 이 술은 꽃잎도 없는 억새의 꽃들이 암술과 노란 꽃밥을 매달고 피워낸 꽃차례입니다. 깊어져 가는 가을, 억새는 열매를 한껏 부풀려 냅니다. 그래서 억새가 무리를 이루면 다른 식물들은 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억세서 이름도 억새입니다. 억새를 갈대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둘은 별개의 식물입니다. 은백색 억새가 산과 들에 많은 것에 비하여 갈대는 강 하구에 많이 자라며 갈색빛을 띕니다. 국립세종수목원 청류지원을 따라 걷다 보면 초겨울의 풍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억새 무리가 많은데 특히 노을이 질 즈음 장관을 이룹니다. 이 길을 걸으며 억새의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함께 느끼고 한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권해봅니다. 다채로운 가을꽃들과 화려한 단풍빛에 눌려 그럭저럭 지내오던 억새는 단풍마저 져 버린 겨울의 초입에 홀로 남아 산과 들을 억새 천국으로 만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백색 억새밭을 지나면 속세의 시름을 잠시 잊기 마련입니다. 억새의 향연은 서리가 내리는 겨울까지 이어지니 세 계절에 모두 피어나는 장한 식물입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억새는 생각보다 참으로 강인한 식물입니다. 줄기는 흔들려도 꺾이지 않고 날렵한 잎새는 손을 베일 만큼 베일만큼 날카롭지요. 씨앗은 바람을 타고 수십 킬로미터를 날아가며 땅속 깊이 뻗은 뿌리줄기는 새로운 개체를 땅 위로 올리며 점유 면적을 넓혀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