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시대를 맞이한 한일관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2019년 여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관계가 급전직하로 경색되었을 때, 이에 대한 대응 모색을 위해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가 기획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린 지 올해로 3회째를 맞이했다. 이후 한국은 수출규제 조치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중견국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여러 사회 경제 지표들은 한일의 종합적 국력이 서로 수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적 수준에서 미중 전략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한일관계도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상황에 진입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올해 국제 심포지엄은 ‘한일관계의 대전환을 논하다’를 주제로 설정되었다. 올해는 한국법제연구원이 공동주관 기관으로 지원했으며, 지난 8월 26일(목) 세종국책연구단지에서 열렸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서 온·오프라인 병행의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개최했다.
지역 질서 변환에 나서야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위로부터의 국익 관점 대신 아래로부터의 시민 생활 관점에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한일 양국이 차이는 차이대로 인식하면서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가는 구존동이의 노력”을 당부했다. 김계홍 한국법제연구원장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미래 세대를 위해 한국과 일본은 만나서 논쟁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현철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은 “지방, 젠더, 신세대에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에 주목하여, 한일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방향과 전략을 함께 모색”하는 데 국제 심포지엄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수훈 전 주일대사는 축사를 통해 대전환기의 특성이 ‘혼란’ 에 있으며, 한일관계가 삐걱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한일관계 대전환을 논하는 것으로써 한일관계가 건설적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질서 전체에 파급력을 갖는 쾌거가 될 것이라 전망하며 전문가들의 다양한 대화를 요청했다.
결단과 실천에 나설 때
이어서 기조강연에 나선 최상용 전 주일대사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오랜 우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일관계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최상용 전 주일대사는 비핵평화의 신념, 선진 민주주의의 경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라는 대전환의 귀중한 선례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 정부가, 레토릭에 구애받지 말고 결단과 실천으로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을 요청했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한일관계 악화가 오로지 정치적 문제이고, 그것이 정치문제인 이상, 한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대국적 관점을 가진다면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정치문제의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의 문제와 전후 처리 문제이기에 일본은 무한책임론에 입각한 사과의 마음을 표시하고, 한국은 2015년 한일 합의를 바탕으로 한 외교적 해결에 노력을 기울여 한일관계를 파멸의 늪에서 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대전환의 전선: 지방, 젠더, 신세대
한일관계가 장기 저강도 복합 갈등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혐한류 현상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한일관계에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전선은 지방, 젠더, 신세대다. 제1부에서는 이에 주목했다.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우려와 긴장 속에서 개최한 일본 지방 도시의 한국 관련 행사에 많은 지역 주민이 운집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K-pop과 영화 등 한국 대중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소비하는 여성과 MZ세대 인구가 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한국을 ‘선망’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유튜브 등 SNS를 이용해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양상은 어떠하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향후 전망은 어떤가? 이들은 한일 양국의 ‘주류’들이 이끌어가는 한일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진원 서울시립대 교수, 하루키 이쿠미(春木育美) 와세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초빙연구원, 권용석 히토쓰바시대학교 교수 등이 각기 지방, 여성, 세대를 중심으로 발제했고, 정미애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후쿠시마 미노리(福島みのり)가쿠엔대학교 교수, 마쓰타니 모토카즈(松谷基和) 도호쿠학원대학교 교수 등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수평화와 대칭화
한일관계 악화가 구조화 장기화하는 배경에 한일관계의 수평화 현상이 있다. 과거 한일관계는 경제와 안보에서 위계적 분업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으며 협력은 상호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양국 사이의 국력 수렴 현상은 한일관계의 수평화와 대칭화를 가져왔고, 협력 또한 선택지의 하나가 되었다. 경제와 안보 협력이 필수가 아닌 상황에서 과거사 또한 관리되지 않게 된 것이 장기적 한일관계 악화의 배경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관계 악화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둘러싼 갈등으로 빚어지는 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미래를 둘러싼 인식 차와 그로 인한 갈등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한일관계의 구조 변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러한 변화가 향후 이 지역의 국제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야기할지 전망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손열 연세대 교수,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학교 교수, 브래드 글로서먼(Brad Glosserman) 다마대학 룰형성전략연구소 부소장 등이 발제하고, 이강국 리쓰메이칸대학교 교수, 최환용 한국법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구마가이 나오코(熊谷奈?子)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수 등이 활발한 토론을 전개했다.
한일관계 재정립을 위하여
한국에서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극복과 코로나19 방역에서 얻은 자신감, 그리고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높은 관심 및 평가를 배경으로 중견국 멘털리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한국은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의 글로벌한 위상이 확인되고, G7에 한국이 초청된 것을 배경으로 실질적인 중견국 외교를 지향하고 있다.
한편 대국외교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외교가 실제로는 중견국 외교라는 지적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이 호주 및 인도등과 관계를 강화해온 궤적은 중견국 외교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동맹 복원, 다자주의 외교 부활은 중견국 외교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기후변동, 환경에너지, 감염증 방역 등의 영역에서 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은 중견국 외교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중견국 협력을 통해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가?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기초로 하는 다자주의를 실천하고자 할 때, 역사 영토 문제의 국제법적 해결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에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 게이오대학 명예교수, 이용일 전 아이보리코스트 대사 등이 발제하고, 이지원 한림대학교 교수, 엔도 겐(遠藤乾) 홋카이도대학교 교수, 리팅팅(李??) 베이징대학교 교수 등이 토론을 통해 논의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한일 협력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한일관계가 더 이상 양자관계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일관계는 미중의 전략경쟁이라는 지구 정치 요소에 보다 민감하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향방은 또한 동아시아 지역질서에 보다 직접적으로, 보다 확대된 형태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고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지구정치가 혼돈과 위기 징후를 보이는 가운데, 한일 양국 정부가 큰 틀에서 보다 대국적 판단으로 관계 개선에 나설 시점이다. 한일관계 대전환이 평화와 번영의 지구 질서를 구축하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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