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미얀마 봄의 혁명, 새로운 아시아적 가치’의 미래를 향한 투쟁

박은홍성공회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2021 가을호

“신식민주의자는 그들이 목표로 삼은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식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 탄 슈웨, 전 미얀마 군부 최고지도자

“실질적인 독립은 인권이 보장될 때에만 가능하다.”
- 아웅 산 수 치, NLD 지도자

올해 쿠데타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미얀마 위기의 기원은 다름 아닌 1962년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다. 당시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세력은 혁명평의회의 이름으로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를 내걸었다. 이들은 사람에 대한 사람의 착취를 근절하고 정의에 기초한 사회주의경제 제도를 수립해 버마 사회를 모든 사회악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독립 직후 버마족 중심의 중앙정부와 변방 소수민족 간 갈등에 따른 정정 불안과 내전이 미얀마 군부 땃마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명분이 되었다. 쿠데타 군부 세력의 중심에는 과거 항영·항일 독립투쟁의 지도자이면서 버마 독립의 영웅 아웅 산의 동료인 네 윈 장군이 있었다. 1962년 이후 버마 사회는 버마족 중심의 사회, 지방 기초 행정단위까지 군이 지배하는 병영 사회, 그리고 민간기업의 자율성을 배제하는 국영기업 중심 사회로 급격히 변화했다.

대표적인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으로서 압축 성장에 성공한 싱가포르로부터 적극적으로 개진된 바 있는 아시아적 가치는 ‘아시아식 민주주의 (Asian-style democracy)’를 옹호한다.
아시아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은 ‘자유’보다 ‘규율’이라는 가치를 ‘아시아성(Asianess)’으로 간주한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

제3세계주의, ‘아시아적 가치’ 패러다임으로 수렴

서구 식민주의에 대한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은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는 국가 주권과 국민 통합에 대한 강조, 반식민 해방 투쟁을 이끈 영웅적 지도자에 대한 절대복종, 국가를 혼란으로 이끄는 의회주의에 대한 불신 등을 공통된 특징으로 한다. 제3세계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 다양성보다는 일치를 강조하는 비자유주의적(illiberal) 성향을 보였다. 이 외에도 자력갱생 모델(autarky model)의 추구, 외국 군사기지 폐쇄, 서구 자본 추방, 국유화,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 등과 같은 정치노선을 취했다. 구세주를 자처했던 가나의 은크루마,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내세웠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이 제3세계주의를 이끈 지도자였다. 여기에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진했던 네 윈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3세계주의의 혁명적 수사학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신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수호자(guardian)를 자처하던 제3세계주의자들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귀결되자 비자본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을 대신해 시장을 수용하는 개발주의로 눈을 돌렸다. 이 지점이 바로 가족, 전통, 집단, 주권, 반서구주의 등과 같은 덕목을 중시하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 패러다임으로 제3세계주의가 수렴되는 변곡점이다.
대표적인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으로서 압축 성장에 성공한 싱가포르로부터 적극적으로 개진된 바 있는 아시아적 가치는 ‘아시아식 민주주의(Asian-style democracy)’를 옹호한다. 아시아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은 ‘자유’보다 ‘규율’이라는 가치를 ‘아시아성(Asianess)’ 으로 간주한다. 아시아식 민주주의를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고 명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미?주의란 문화 구속적·역사 구속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현태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며, 그들을 민주주의를 세계표준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태도는 비서구 사회를 폄하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수상은 유럽 정상들에게 “아시아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이며, 유럽의 가치는 유럽의 가치”라고 말했으며, 싱가포르의 고촉통 총리는 “싱가포르인은 서구형 민주주의와 자유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반면 아시아적 가치 반대론자들은 아시아적 가치 그 자체를 독재(strongman politics)를 정당화하는 신가산제(neopa trimonialism) 국가 이데올로기이자 서구를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역비판한다. 특히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정치지도자들의 경우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국제사회의 관여를 국가 주권 침해,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면서 억압적 통치체제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아웅 산 수 치 민간 정부를 전복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내정불간섭 원칙을 들먹이면서 사실상 군사평의회(junta)를 승인한 중국 정부가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제3세계주의의 맥락에 있던 버마식 사회주의의 뒤를 이은 규율민주주의는 아시아식 민주주의의 미얀마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규율민주주의’라는 아시아적 가치를 넘어 미래를 향한 투쟁

미얀마 옛수도 양곤에서 벌어진 반쿠데타 민주화 시위대 모습

항영·항일 독립투쟁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얀마 군부 땃마도는 1990년대 이후 그들의 특권 유지를 위한 3개의 주요 방어선을 구축했다. 1차 방어선으로 군병력과 친군부 정당, 2차 방어선으로 군부 기업과 그 이해당사자, 그리고 마지막 3차 방어선으로 군의 특권을 보장한 2008년 헌법이 그것이다. 2008년 헌법은 ‘규율민주주의(discipline-flourishing dem ocracy)로의 7단계 로드맵’에 따라 제정되었다. 2008년 헌법은 의회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고 내무부, 국방부, 국경수비부 장관직을 현역 고위급 장교가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국가 비상사태 국면에서 군 총사령관이 정치권력을 접수하도록 함으로써 ‘합법적 쿠데타’의 길을 열어놓았다. 쿠데타가 일어나면 보통 기존 헌법이 군부에 의해 폐기되는데, 지난 2월 1일 민 아웅 흘라잉 군 총사령관이 주도한 쿠데타 이후 2008년헌법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3세계주의의 맥락에 있던 버마식 사회주의의 뒤를 이은 규율민주주의는 아시아식 민주주의의 미얀마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민 아웅 흘라잉 군 총사령관의 전임자이자 19년 동안 미얀마의 독재자로 군림한 탄 슈웨 장군은 2011년 1월 4일 미얀마 독립 63주년 기념 메시지에서 “신식민주의 세력들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종이 되길 강요하고 있다”라며 당시 제재(sanction)를 가하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아시아적 가치와 일맥상통한 규율민주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한 2008년 헌법을 강행 처리한 탄 슈웨 미얀마 군부 최고지도자의 의식 속에서 제3세계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더해 탄 슈웨 장군의 메시지를 기사화한 국영 신문 <글로벌 뉴 라이트 오브 미얀마(Global New Light of Myanmar)>는 수도 네피도에 있는 3명의 전사왕(warrior kings) 동상 사진을 같이 게재하면서 과거 이들이 그들 각각의 왕국을 수호했듯이 강력한 군만이 현재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지도자들처럼 탄 슈웨로 대표되던 땃마도 지도자들이 전통을 소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탄 슈웨로부터 군 최고 권력을 이어받은 민 아웅 흘라잉은 1990년 5월 아웅 산 수 치의 민족민주동맹(NLD)이 압승한 총선 결과를 군부가 뒤엎고 ‘파괴적 안정 시기’를 구축했던 역사를 재현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식민주의자에 다름 아닌 군부를 국가의 수호자로 설정한 규율민주주의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의 의지는 한층 더 확고하고, 시민불복종운동(CDM)은 연방군(federal army) 결성을 목표로 한 시민방위군(PDF)으로 분화·발전하고 있다. 이들은 1962년 땃마도의 정치 개입 명분이 되었던 소수민족과의 분쟁 종식과 명실상부한 연방민주주의 수립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이렇듯 미얀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봄의 혁명’은 군부의 수호자적 역할을 명문화한 2008년 헌법체제에 대한 거부이자 규율민주주의로 표현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를 넘어 새로운 아시아적 가치의 지평을 넓히려는, 미래를 향한 범국민적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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