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99년 연구회 체제”를 넘어 - 제3차 NRC-KAIST 공동심포지엄

디지털 문명의 인간학적 의미와 성찰

김성도고려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2023 여름호

2023년 제2차 인문관통은 카이스트와 함께 공동주관으로 추진된 3번째 심포지엄으로서 현재 진화하고 있는 AI 기술은 우리 인간 본연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발전해야만 인류 문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향점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AI 시대 인문학의 활용성을 높이고 침체된 인문학의 새로운 중흥을 위해 인문사회계 전문가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계 전문가들도 함께 인문학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38억 년 전 창발한 대서사의 관점에서 볼 때, 불과 30만 년 전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최근세의 사건이다. 그러나 도구를 제작한 데에 이어 언어라는 비밀 병기를 갖게 된 인류는 단숨에 지질계(geosphere)와 생명계(biosphere)를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도구 제작과 언어 구사라는 점에서 21세기 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디지털 혁명과 인공지능 혁명은 숙명적 여정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대략 7만 년 전 인지혁명을 성취한 이후 연속적으로 일궈낸 신석기 혁명, 과학 혁명, 산업 혁명, 디지털 혁명의 주인공이다. 이 점에서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새로운 기술의 발명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문학자들은 너무나 쉽게 망각한다.

디지털 문명 변동의 총체성과 와해성

커뮤니케이션은 생명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열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중 인간은 유일하게 커뮤니케이션 활동 속에서 신체의 수고를 덜어주거나 대체할 수 있는 인공물을 만들어낸 유일한 종이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은 정보의 발신, 수신, 저장, 처리, 전달이라는 기본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 혁명과 인공지능 혁명은 과거의 기술에 비해 보다 파상적인 와해적 혁신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술 혁명이 아닌 문명사적 변동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 혁명 이전에 문화적 ‘임팩트’를 준 두 개의 사건으로서 문자와 인쇄술의 발명을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언어 측면에서, 또 다른 중추적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래를 예측하고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도록 해준 음성 언어 구사 능력(Homo loquens)을 구비한 것과 예술성 차원에서 최고 수준의 휘황찬란한 그래픽 이미지들을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문자의 발명은 법 체제를 구성하면서 최초의 도시 국가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고, 화폐 제작을 통해 상업교역을 가속화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하학, 수학 등의 교육에 있어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했으며, 종교 역시 경전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다름 아닌 문자의 숭배라고 말할 수 있다. 문자가 문명과 역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두 번째 언어 기술 혁명인 인쇄술은 지폐를 상용화시키며 상업 교육 방식이 바뀌었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경제적 파급 효과보다 중요한 영향력은 책의 확산을 통해 종교적 권위가 약화되고 종교 개혁이 촉발된 데 있다. 신교가 장려한 개인의 독립성을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일조함으로써 문화 혁명과 지식 혁명을 가져왔다. 특히 인쇄술의 발명은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고 더 많은 시간을 실험에 투자하게 만듦으로써 근대과학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디지털 문명의 총체적 지식 체계 부재

인류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세 번째 혁명인 디지털 정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수반하는 변화는 그것의 이동성, 속도, 팽창력, 용량 차원에서 산업 혁명 시대의 하드웨어에 의해 생성된 혁명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은 개인적·주관적이라고 믿고 있던 인지 능력을 집단화·객체화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집단적·객관적 기억을 획득했다. 새로운 디지털 문명은 기억, 이성, 상상력의 매체로 인지적 도구들을 구비하였다. 이를테면 인터넷은 전 지구적 기억이며 인류의 집단적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상적 효과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파편적 설명에 머무르고 있다. 하드웨어와 하드테크닉에 관한 정밀한 물리적 법칙을 제공하는 자연과학과 공학과 달리, 디지털 소프트 파워에 관해 아직 종합적 지식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생명체에 필요한 활동에서 발생한 다양한 정보 축적과 교환 방식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나 삶의 양식들을 지배한다. 그런데 그 같은 변화는 단순한 진화론이나 하나의 매체가 다른 매체를 몰아내는 단순 대치의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경제성과 효율성의 논리가 우세한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은 사라질 것인가? 최근에 읽은 실험 결과 논문에 의하면 종이로 읽는 독서가 디지털 매체 위에 기록된 콘텐츠 독서에 비해 이해력 차원에서 보다 우수한 결과들을 산출했다는 일치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전통적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라는 근본적 화두를 던져야 할 것이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생태학적 비판의 필요성

인문학 관점에서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는 디지털 문명에 관한 생태학적 사유이다. 디지털 기술이 야기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정신적 병리 현상들을 비롯해 에너지 소비증가와 디지털 폐기물이 미칠 부정적 효과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더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실행 프로그램이 제시되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포함한 모든 문명 양식은 인류에게 기술의 수혜를 가져다 줌과 동시에 그것의 ‘엔트로피’, 즉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성과 역효과를 야기하며 쇠락을 가져올 수 있는, 빛과 그늘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점에서 20세기 현대 인류학의 거장,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기발한 공식 ‘인류학(anthropology)=엔트로피학(enthropology)’은 디지털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공식을 디지털 문명에 적용하면, 디지털학(Digital Sciences)은 곧 그것의 긍정적 모습과 동시에, 부정적 효과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디지털 엔트로피학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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