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2   대한민국 국가정책연구의 역사를 만나다 : 1970~90년대를 중심으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희망을 밝히는 연구소로

원유형한국과학기술연구원 부설 녹색기술센터  정책전문위원 2021 가을호
1965년 한미 정상회담 직후 동아일보 보도내용

쌀 한 가마가 3,000원 남짓이던 시절, 당시 금액 2,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출자해 설립한 국책연구기관이 있다. 이 연구기관은 본격적으로 연구에 착수한 지 40여 년 만에 600조 원의 경제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수많은 국책연구기관의 모태가 되었다. 이 연구기관이 바로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다. 이 연구기관의 지원·육성은 1967년 과학기술처 설치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이곳의 초대 소장이자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한국기네스북에 최장수 장관으로 등재된 이가 바로 최형섭 박사다.

1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식(1969.10.23.)
2 수출진흥을 위한 전자기술 개발 세미나(1973.02.23.)

한미 공동성명과 KIST의 정식 출범

1961년 말부터 추진한 공업 관련 연구기관 설립은 당시 국가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그러다 1965년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연구소 설립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베트남 파병 등을 계기로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을 국빈 초청했고, 1965년 5월 18일 두 정상이 만나 회담을 가진 후 12가지 의제에 대한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성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라고 밝혔다. 이에 한국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 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 가능성에 대해 국내 공업·과학·교육계 지도자들과 검토하기 위해 자신의 과학기술 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한다”라고 화답했다. 이 합의 사항은 KIST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따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과학기술연구소 설치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연구소 신설 목적을 ‘산업발전에 직접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의 제공 및 연구 수행, 재외 한국인 과학기술자의 국내 유치 및 연구 활동 지원’으로 명시했다. 이어 1965년 7월에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 담당 특별 고문 도널드 호니그(Donald Hornig)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이 우리나라를 방문, KIST 설립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본 사항을 조사해 작성한 ‘호니그 보고서’ 를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 보고서 등을 토대로 1966년 2월 10일 KIST가 정부 출연 연구기관으로 정식 출범하면서 세 가지 기본 이념을 세웠다. 첫째, 연구의 자율성 확보다. 연구를 추진하는 데 자율성이 훼손되면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둘째, 재정의 안정성이다. 우수 인력의 유치, 현대적 시설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합리적이고 역동적인 연구 분위기 조성이다. 이러한 연구 환경 제공은 우수한 연구 인력의 확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KIST의 기본 이념과 운영 방침이 확정되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육성법(안)’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 12월 27일 법률 제1857호로 제정되었다.

KIST는 출범하며 연구의 자율성 확보,재정의 안정성, 합리적이고 역동적인연구 분위기 조성을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자료: 월간조선

세계 최초의 역두뇌 유출 프로젝트

KIST가 설립되었지만 아직 예산이 부족해 제대로 된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종로구 청계천 6가에 위치한 한일은행 지점(1966년 4월 1일~1967년 1월 16일)과 종로의 기독교청년회(YMCA·1967년 1월 17일~1968년 7월 27일)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했다. 현재 위치인 홍릉에 자리 잡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KIST 부지로 홍릉 임업시험장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당시 농림부 장관이 거절했고,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38만 평 모두를 제공하라”라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결국 1968년 5월 22일 최종적으로 15만 평의 부지에 연구소를 건설하게 된다. 연구 인력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 박사는 미국을 돌면서 한인 과학자들을 만나 “노벨상이 목표인 분들은 여기에 남으셔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와 함께 갑시다” 라며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했다. 이런 정성으로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을 넘는다. 미국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이를 두고 “세계 최초의 역두뇌 유출 프로젝트”라고 평가라기도 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

호닉보고서 표지

KIST의 설립 목적은 기업이 당장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므로 연구소는 설립 초기 산업계 현안부터 조사하고 연구했다. 이에 따라 연구과제는 생산 공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기술 지도와 단기 연구과제가 주를 이루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과학기술과 산업 육성에 필요한 각종 기초 자료 수집과 정책 및 조사 연구도 KIST 업무의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자 계산 시스템을 행정 부처나 산업계에 도입하기 위한 기초 작업도 KIST에서 최초로 수행했다. 설립 이후 KIST의 수탁연구제도는 빠르게 정착했고 연구용역도 증가했다. 설립 초기 수탁 건수가 연평균 70여 건이던 것이 1970년대 전반에는 188건, 후반에는 210여 건으로 3배 증가했다. 그뿐 아니라 과제당 평균 연구비도 설립 초기 246만 원에서 1970년대 후반 3,460만 원으로 14배가량 급증했다. 이는 KIST가 수탁 연구를 수행하는 데 실험 실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공업화와 더불어 중간 실험 수행 결과를 산업계가 직접 상품화할 수 있도록 지원했기 때문이다. KIST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수립과 제도 마련에 다양하고 폭넓게 기여해왔다. 초기에는 국책사업에 대한 정책 수립과 그 시행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이런 역할로 KIST는 1970년대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과학기술 분야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국제 협력 과정에서 개발도상국 연구기관의 모범 사례로 소개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외교에 크게 기여했다.

KIST는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 정부의과학기술정책 수립과 제도 마련에다양하고 폭넓게 기여해왔다.
이런 역할로 KIST는 1970년대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과학기술 분야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로이터통신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25개 연구기관’ 중 KIST는 6위에 올랐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효시

흔히 KIST를 국내 정부 출연 연구소들의 모태라고 말한다. 국내 대부분의 국책 연구소가 KIST에서 분가(分家)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KIST에서 독립한 연구소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다. 1973년 KIST 부설 해양개발연구소는 3년 뒤인 1976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되었고, 지금은 극지연구소까지 갖추고 있다. KIST에서 분화한 연구소는 부설 기관까지 합쳐 모두 16개에 이른다. 그 가운데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전자산업의 르네상스를 맞아 모태인 KIST에 필적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KIST에서 분화한 연구소는 왼쪽 표와 같다. KIST의 법적 지위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둘러싼 국가 과학기술정책이 진화하고 변화하면서 바뀌게 된다. 1981년 제5공화국이 대학원 과정의 학사 운영이 주 임무였던 KAIS(한국과학원)와 통합되어 KAIST(한국과학기술원)로 새로이 출발했다가 1989년 재출범하기도 한다. 1999년 연구회 체제가 출범하고, 2004년 말 국가 과학기술 행정 체제 개혁으로 과학기술계 정부 출연 연구기관은 국무총리실에서 다시 당시 과학기술부로 관리가 이관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자리 잡았다. 2016년 초 로이터통신은 전 세계 연구기관의 논문과 특허 실적 등을 분석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25개 연구기관’을 선정해 발표했다. KIST는 여기서 아시아 연구기관 중 두 번째인 6위에 올랐다. KIST는 이런 위상을 바탕으로 막대한 국가적 부(富)를 창출하는데, 2014년 기술경영경제학회 보고에 따르면 그 규모가 총 595조 원에 이른다. 한국 경제·산업 성장에 혁혁한 성과를 남기게 된 것이다. 현재 KIST가 위치한 홍릉 일대는 국가 강소특구로 지정되어 세계적 바이오 클러스터로의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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