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의 시대’ 한국 싱크탱크와 소프트파워
대절멸의 시대 또는 대전환의 시대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지난해 12월 9일, ‘세계평화, 번영, 지속 발전에 기여하는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을 주제로 ‘2020 글로벌 코리아 박람회’를 개최했다.지금 인류는 미증유의 속도, 강도, 난도를 지닌 문제들을 한꺼번에 겪고 있다. 지구 대절멸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환경파괴와 기후 위기부터 지카, 에볼라, 사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감염병의 대유행, 호모사피엔스종으로서는 처음 겪는 인구 감소,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와 국제질서의 불안정,극단적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위기, 악화일로를 거듭하는 국제적·국내적 양극화와 불평등, 인간의 경계와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이런 일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호모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러한 난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그래서 대절멸이 아닌 대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더 이상 황당무계하거나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답해야 하는 주제가 되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얽히고설켜 지독히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접할 때, 우리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단칼에 베어 풀어버린 알렉산더대왕의 용기와 지혜를 칭송한다. 인류가 직면한 지구적 난제 또한 그렇게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베어 풀면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러긴 어려워 보인다. 난제들의 매듭은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나 하나의 강력한 국가가 단번에 풀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슬기롭게, 그리고 함께 풀어야 하는 매듭이다. UN이나 WHO와 같은 국제기구가, 각각의 정부가, 기업이, 시민사회와 NGO가, 그리고 조직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연결된 시민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싱크탱크라는 지식 집단에 주목하게 된다. 세계의 주요 싱크탱크들은 아이디어와 정보를 기반으로 지식 권력과 소프트파워를 발휘하며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싱크탱크의 시대와 소프트파워
세계 싱크탱크들은 그들이 속한 나라에 따라, 역사에 따라 유형과 역할을 달리해왔다. 그럼에도 세계 싱크탱크들의 규모와 영향력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세계 싱크탱크들에 대한 실태 조사와 영향력 평가를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제임스 맥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싱크탱크의 나라’ 미국에 2,200여 개, 유럽에 2,900여 개의 싱크탱크가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와 중동의 싱크탱크도 계속 늘고 있고,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탱크의 숫자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틱하게 급증하는 중이다. 가히 ‘싱크탱크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맥갠 교수는 싱크탱크의 세계적 성장은 정보와 기술의 혁명, 정부의 정보 독점 종료, 정책문제의 복잡성 증대, 정부 규모의 확대, 정부와 선출직 관료의 신뢰 위기, 지구화와 (비)국가 행위자의 성장, 시의적절하고 가장 적합한 형식과 내용이 정보 필요성 등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세계 주요 싱크탱크들은 국내외적으로 이미 막강한 소프트파워를 발휘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싱크탱크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이디어’, ‘영향’, ‘해법’이라 할 수 있고, 싱크탱크의 성과와 영향력은 청중(audience), 동료(peer), 평판(reputation)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따라서 대전환의 시대는 세계 싱크탱크들에게 기회이자 위기다. 지구적 난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아 영향력을 발휘하고 청중과 동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다면 그것은 기회가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위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의 싱크탱크들은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 의 싱크탱크로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기회이자 위기를 맞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그간 한국의 발전 전략은 일종의 ‘따라잡기’였기에 한국은 ‘Catch up State’라 불렸다. 그것은 싱크탱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잡기라는 국가적 정책 수요에 맞춰 국책연구기관들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 한국개발연구원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 개별 부처와 직접 연계된 국책연구기관이 등장했고, 1999년에는 연구회 체제가 출범했다. 2005년 이후 현재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양대 체제로 재편되었고, 특히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정부출연연구기관법에 근거해 국무총리 산하기관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및 해당 소속 26개 연구기관은 연간 1조 원가량의 예산을 보유 중이며, 2,000명에 달하는 박사급 연구자를 포함한 6,000여 명의 임직원을 두고 있다. 이는 기업 계열이나 시민사회 기반의 민간 싱크탱크, 정당 연구소나 대학 연구소는 물론 해외와 비교하더라도 월등한 규모다. 이들은 그동안 선진국을 따라잡으면 되는 시대의 싱크탱크, 즉 ‘Catch up Think Tank’ 역할을 주로 해온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 대응 과정을 거치며 대한민국의 국격과 국제적 위상은 크게 상승했다. 방역뿐 아니라 경제와 민생 등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다. 지난 6월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초대된 문재인 대통령이 다른 나라 정상들로부터 받은 대우는 이를 방증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지난 7월 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으로 공식 격상했다. 57년 만에 한국이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되었음을 국제사회가 공식 인정한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작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특별 연설을 통해 선언한 ‘세계 선도 국가’의 목표는 이런 맥락과 흐름에서 이해된다.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들은 더 이상 다른 나라를 따라 하거나 따라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전환 시대를 선도하는 글로벌 싱크탱크(Global Leading Think Tank)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세계 선도 싱크탱크로서 역할과 도전:
기후 위기와 국제협력의 사례
세계 주요국의 환경 분야 독립 민간 싱크탱크들은 기후 위기 대응의 아이디어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지속 가능성을 핵심 연구 주제로 삼고 있는 유럽환경정책연구소(IEEP),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시민행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독일의 신기후연구소(NCI), 미국 최초 환경 전문 싱크탱크인 미래를 위한 자원(RFF)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종합형 싱크탱크들—민주당 계열의 브루킹스연구소나 미국진보센터, 공화당 계열의 헤리티지재단 등—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기후변화와 에너지 이슈에 관한 아이디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국책연구기관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국책연구기관들은 연구회 체제의 장점을 활용해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 싱크탱크에 요구되는 새로운 역할에 부응하려 하고 있다. 연구회는 그간 다양한 협동 연구를 기획·수행해왔고, 협동 연구를 체계적·전략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여러 개의 연구단과 연구회 등 플랫폼을 만들었다. 지난 6월에 탄소중립연구단을 출범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연구단은 연구와 토론 등을 통해 탄소중립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및 ‘2050 탄소중립위원회’에 대한 정책 지원을 도모하고 있다. 아이디어 경쟁뿐 아니라 협력을 통한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는 작업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한편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제사회를 이끄는 선도 국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2019년 글로벌코리아포럼을 결성했다. 정부와 공공기관, 기업, 국민이 함께 주체로 참여하는 국제 협력 유관기관들의 ‘소통과 통합의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다. 작년에는 ‘세계평화, 번영, 지속 발전에 기여하는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을 주제로 160여 개 기관이 참여하는 ‘2020 글로벌 코리아 박람회’가 개최되었고, 올 11월에는 ‘코로나19·기후 위기 시대 국제개발협력과 한국의 역할’을 주제로 2021 글로벌 코리아 박람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는 기후변화, 자연 재난 등 지구적 과제들을 논의하고, 선도 국가 도약을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 활성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한편 글로벌코리아포럼과 같은 통합 플랫폼과 별도로 GRC(Global Research & Consulting Council) 플랫폼을 구축해 국제 협력의 진화도 꾀하고 있다. 한국-인도네시아 산업혁신 연구 사업은 과거에 진행했던 것을 전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한국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Making Indonesia 4.0’의 실현에 필요한 산업정책 공동 연구가 그 사례다. 캄보디아 국가정책연구 역량 강화 사업 역시 흥미롭다. 개별 사업이나 프로그램의 전수를 넘어, 자국의 국가 전략 정책 수립 역량을 갖추기 위해 경제·인문사회연구회를 포함한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의 시스템 자체를 배우겠다는 캄보디아 측 요청에 따라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K-싱크탱크의 ‘꿈’과 ‘길’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카네기기금은 지난해 “미· 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보건 협력, 기후변화 대응과 같은 아젠다에서 한국의 소프트파워 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코로나19 정책 대응부터 BTS 등 문화 이슈에 이르기까지 최고조에 달했고, 기후변화와 같은 초국적 문제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9월에 열린 UN 총회 ‘지속가능발전목표(SDG) 모멘트(Moment)’ 행사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과 BTS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내놓은 메시지는 이러한 평가가 과찬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지난 10월 한국의 소프트파워 역량에 주목하여 ‘안보를 넘어서: 한국의 소프트파워와 코로나19 이후 세계에서 한·미 동맹의 미래’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조셉 나이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는 “한국은 커다란 소프트파워를 가졌다”며, “올바른 투자와 노력을 통해 더욱 많이 가질 수 있을 것” 이라고 평가했다.
여기 그리고 지금
대절멸이 아닌 대전환 시대를 이끌어가는 글로벌 리더십을 한국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싱크탱크, 국민의 싱크탱크, 세계의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싱크탱크들의 소프트파워야말로 글로벌 리더십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기후 위기 대응이나 국제 개발 협력과 같은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청중과 동료들에게 시의적절하면서도 가장 적합한 형식과 내용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싱크탱크, 특히 국책연구기관들의 ‘대전환에 걸맞은 대전환’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선도 국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다시 말해 글로벌 K-싱크탱크의 꿈과 길은 이제 너무 크지도, 너무 멀리 있지도 않다.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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