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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상 전략과 한일의 새로운 협력공간

이창민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2024 여름호

2022년 5월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하고, 이에 근거해 2023년 11월에 라인야후나 소프트뱅크와 같이 경제안보상 중요한 인프라 기업들을 ‘특정사회기반사업자’로 선정했다. 이는 경제안보상 중요한 이슈가 발생할 경우, 정부가 이들 기업에 강력한 개입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 지원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라인야후에 대한 총무성의 이례적인 수준의 개입이나 소프트뱅크의 생성형 AI 개발에 일본 정부가 자금 지원을 결정한 배경이다. 한일관계는 최근 1년 사이에 급변했지만 한·일을 둘러싼 통상 환경의 변화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한·일을 둘러싼 통상 환경의 변화

2018년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큰 획을 긋는 한 해였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결정했고, 한국 대법원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본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급기야 그다음 해인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판결에 대한 보복적인 성격이 짙은 수출관리강화조치를 취하였고,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은 우리 모두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일본의 수출규제는 명백한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 행위였다. 2010년 중국의 희토류 수출규제로 경제적 강압의 피해자였던 일본이 2019년에는 반대로 한국을 상대로 전략물자를 이용한 경제적 강압을 시도했던 것이다.

2018년은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문재인 정부의 신통상 전략을 제시했던 해이기도 하다. 당시 발표되었던 신통상 전략에는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신흥시장으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며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추진하고 디지털 통상 선도를 통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4위 수출 강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지면서 신통상 전략의 목표는 대부분 달성되지 못했다. 순위 변동은 있었지만 미·중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여전하고 일본이 주도하는 CPTPP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디지털 통상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지도 못했다. 오히려 일본과는 사이가 소원해졌고 시종일관 미·중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정권이 교체되었다.

경제안전보장 이슈와 한미일 협력공간의 변화

윤석열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한일관계 개선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결국 2023년 3월과 5월 한일 정상회담이 실시되고 8월에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3국이 공동의 이익과 안보를 위한 파트너십 구축을 약속했다. 이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3국 간의 경제안보, 첨단 기술, 인적 교류 분야에서 협력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공급망 협력 강화를 위한 조기 경보시스템 연계 협력, 혁신기술 보호, 국제표준화, 인공지능 및 디지털 분야의 국제규범 마련을 위한 협력도 진행되고 있다. 일본과의 협력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지난 60년간 한일 협력의 성격은 자금협력에서 기술협력으로 그리고 통화협력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현재는 한일 경제력의 격차 축소, 산업구조와 통상구조 변화로 과거의 협력 의제들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2024년 5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년간 윤석열 정부의 통상정책 흐름과 향후 3년간의 청사진이 담긴 신통상 전략을 발표하였다. 이번에 발표된 신통상 전략은 시대적 상황과 국제 정세를 반영하여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발효와 같은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을 조정하고 향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다양한 시나리오별 대책을 마련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미일 반도체 수출통제 삼각공조 방안,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 공급망 협력 국가 확대를 통한 경제안보 강화 등에서는 ‘연대와 공조를 통한 국익의 극대화’라는 윤석열정부의 신통상 전략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한일 협력 의제

‘연대와 공조’라는 관점에서 한일 양국의 새로운 협력 의제 중 하나는 디지털 분야의 국제규범 마련을 위한 협력이다. 일본이 디지털화에 뒤처져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디지털 무역의 국제규범 제정에 있어서만큼은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소위 TPP 3원칙으로 알려진 디지털 무역 자유화 규정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을 보장해야 하고, 미일 디지털 무역협정은 이러한 TPP 3원칙보다 더 높은 강도의 디지털 무역 자유화를 보장하고 있다. 미일 양국은 중국과 같은 나라에 대해서는 데이터 주권을 강조하지만 우방끼리는 개방성을 더 강화하는 형태로 국제적 규범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로서는 CPTPP에 가입하거나 한미일 다자, 또는 양자 간 디지털 무역협정을 체결해서 디지털국제규범의 표준화 과정에서 협력의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국제규범 마련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협력의 공간은 그린·바이오 분야이다. 일본 정부는 2022년 1월 녹색 기술투자를 위한 이니셔티브 발표에 따라 ‘아시아제로배출공동체(Asia Zero Emission Community, AZEC)’를 출범시키고 2023년 12월 도쿄 총리 관저에서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호주를 필두로 동남아시아 9개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일본은 AZEC을 통해 탄소 포집과 저장에 있어서 국제규범을 제시하고 안정적인 바이오에너지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을 위한 경제적·기술적 과제해결과 국제협력이 필요한 우리에게도 일본이 이끄는 AZEC는 국제협력의 중요한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아직 출범 초기인 AZEC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다면 그린·바이오 분야에서 일본과 함께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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