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99년 연구회 체제”를 넘어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이 함께 찾는 인재 양성의 길
이국운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 前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 2023 가을호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에 속한 연구자들과 학문 공동체의 건강하고도 생산적인 관계 맺음을 위하여 몇 가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차적으로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주관하는 문과 쪽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주관하는 이공학 쪽이나 중앙 및 지방정부의 연구기관 연구자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을 오가는 단편적이고 두서없는 아이디어들이지만, 현시점에서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논점인 듯하여 용기를 내본다.
독특한 개별성과 출연연의 역할
먼저 확인해 두고 싶은 점은 학문 공동체에 존재하는 독특한 개별성(individuality)의 문제이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공공적 담론이며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도 절대 독점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성은 오로지 학자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만 발생하고 구현된다. 학문의 세계가 양심의 영역으로서 정치·행정·경제·종교의 세계로부터 확연하게 분리되는 이유이다. 학자 역시 이성과 양심의 요청 앞에 부끄러울 수 있고, 학문 공동체 또한 다른 사회적 힘의 영향 아래 놓이기도 하지만, 이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학자 개개인이 다시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일깨워 학문 공동체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뿐이다.
법률에 따라 설립 목적이 정해지고, 수행해야 할 연구과제들이 주어져 있으며, 시대변화에 맞추어 정부 국정과제에 부응해야 하는 출연연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학문성의 요청, 특히 그 본질에서 우러나는 독특한 개별성의 요청은 상당 수준의 긴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출연연의 연구자들은 본래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므로 이러한 긴장은 이례적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출연연은 국가 관료제와 학문 공동체의 경계선에 위치할 수밖에 없고, 그 소속 연구자들은 2개의 다른 세계에 동시에 속한 이중 신분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긴장 관계 또는 이중 신분을 어떻게 바르게 활용하여 출연연과 학문 공동체 사이에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느냐이다.
각 연구자에게 학자로서의 고유한 관점이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출연연의 연구는 대체로 프로젝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프로젝트의 목표는 정부의 장단기 정책 수립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결과는 연구보고서 형태로 산출된다. 정책연구의 성격상 이와 같은 포맷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나, 결정적인 문제는 이로부터 이론적 축적과 발전을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연구의 양적 확대를 이론적 성숙으로 연결하려면, 개별 연구자들이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의 가설·방법·결과·영향 등을 관련된 다른 연구들과 비교·분석·종합하여 일관된 이론적 관점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적어도 3~4년에 한 번 정도는 개별 연구자들이 소논문 등을 통해 특정 분야의 연구 전체를 검토·평가하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개진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출연연에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수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 연구자는 이론적 성숙을 위한 경험 자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만이 아니라 이론적 권위자로서도 성장하여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경제·인문사회 분야도 UST를 벤치마킹해야
출연연의 연구시설 및 연구 수행과정을 활용하여 연구자들이 학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학문 후속세대 양성에 직접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출연연의 연구는 사전 조사에서부터 기획, 자료 수집, 분석, 보고서 작성 및 검토, 정책반영, 사후 평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한 절차와 과정으로 진행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이 그대로 학문 후속세대의 체계적인 양성을 위한 실무 훈련과정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주목하여 이공학 쪽에서는 오랫동안 프로젝트 기반 학습(project-based learning)을 발전시켜왔고, 20년 전부터 32개 국가연구소 연구자들이 대학원생들의 교육에 참여하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UST)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관 출연연들은 연구시설 및 연구과정을 교육에 활용할 만한 제도를 갖추지 못한 상태다. KDI 국제정책대학원대학교(KDI School of Public Policy and Management)가 운영되고 있으나 연구 분야의 포괄성이나 다른 출연연 연구자들의 교육 참여 등에 있어서 UST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UST의 사례는 융복합 분야의 연구자 양성 및 수급의 원활성을 기하고 연구기관들 사이의 학문적 교류를 증진하는 관점에서 반드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융복합적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학문 공동체와 출연연들의 관계 조율에 있어서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연구지원 관련 정부 조직의 거버넌스를 재고하는 것이다. 현재의 법령은 과학기술분야 출연연들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국가과학기술연구회-각 연구기관의 축으로, 경제, 인문사회 분야 출연연들을 국무총리-경제·인문사회연구회-각 연구기관의 축으로 조직하고 있다. 이중적 거버넌스는 이공학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해 온 역사적 경로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 및 메타버스 시대에 펼쳐질 융복합 분야의 연구경쟁력을 높이려면 비(非)이공학 분야에 관해서도 연구지원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예컨대 국무총리 산하에 차관급 부처로 국가연구지원처급의 부처를 신설하여 연구지원을 전담케 하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가 관료제, 출연연, 학문 공동체 사이에서 정책적 조율을 담당하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언젠가 닥칠 정부조직 개편의 기회를 살리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기하고 싶은 점은 3가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과연 누가 귀담아듣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당연직 법정 이사인 각 부처의 차관들과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고위 공무원들의 역할은 학문 공동체를 대표하는 선임직 이사들의 역할만큼 중요하다. 출연연에 속한 연구자들이 본래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잊지 말고 학자의 긍지를 살리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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