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미네르바 스쿨’을 표방하는 태재대학교의 교육 혁신 실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태재대학교는 한샘 창업주인 조창걸 명예회장이 사재 3,000억 원을 들여 설립한 대학으로 염재호 전 고려대학교 총장이 초대 총장을 맡았다. 캠퍼스 없이 세계 각국을 돌며 온라인 수업을 받는 교육방식에 따라 학생들은 글로벌 현장 감각을 키우고 실천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키우게 된다. 이처럼 차별화된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태재대학교의 교육목표다.
태재대학교의 교육방식과 인재상은 염재호 총장의 교육철학과도 맥이 닿아 있다. 형식지(形式知)와 같은 지식 주입에 초점을 맞췄던 20세기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나만의 지식, 즉 암묵지(暗默知)를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교육철학이다. 평생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육 개혁과 인재 양성에 힘써 온 염 총장은 싱크탱크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식견을 지녔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맞춰 새로운 도전에 나선 염 총장을 만나 태재대학교의 교육 실험과 의미, 싱크탱크의 핵심 인재 육성 방안을 짚어봤다. 이번 인터뷰는 9월 14일 태재대학교에서 홍일표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싱크탱크의 힘이 경쟁력을 좌우
홍일표 사무총장(이하 홍일표)
훌륭한 연구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곳은 싱크탱크, 특히 국책연구기관이 해야 할 일이며, 그 출발은 대학이어야 한다고 본다. 평생 대학에서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오셨고, 고려대학교 총장 시절부터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학교육 개혁, 인재 양성을 위한 새로운 시도에 힘쓰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신설된 태재대학교 총장을 맡아 평생의 지론을 현실화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태재대학교에서 어떤 실험과 도전을 하려 하는지, 어떤 취지에서 이런 도전을 시작하게 됐는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 말씀을 듣고 싶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이하 염재호)
고려대학교 총장 시절부터 우리의 고등교육이 이대로는 안 된다,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현 고등교육 시스템은 20세기 대량생산 체제에 맞춰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식을 잘게 쪼개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객관적인 지식보다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나만의 지식, 즉 암묵지를 지닌 인재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디지털 혁명에 의해 인류 문명사가 바뀌고 있는 만큼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20세기 말까지는 학부 중심의 전공 교육이 중요했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학부에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탄탄한 기초체력을 갖추고 심화 교육은 대학원이 담당하는 체제로 변모했다. 태재대학교는 첨단 온라인 학습 플랫폼을 활용한 액티브 러닝(active learning)이나 토론식 수업 등을 통해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워내려 한다. 또한 조창걸 이사장님의 경우 21세기 들어 문명사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고 있고 지금처럼 국가 간 갈등이 심화하는 국면에서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리더를 키워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태재대학교는 세계 인재, 미래 인재, 자기혁신 인재 3가지 인재상을 추구한다. 다수를 먹여 살리는 소수의 인재를 잘 키워놓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영속성이 사라진다고 본다.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그러한 소수의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관점으로 태재대학교의 문을 열게 됐다. 싱크탱크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지식사회로 가게 되면 결국 싱크탱크의 힘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지금처럼 국제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면에서는 그 흐름을 읽는 눈이 있어야 문제가 발생할 때 빨리 해법을 찾을 수 있고 이는 결국 국가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그런 측면에서 싱크탱크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며, 우리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다.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원 진학이든 기업 입사든 다양한 진로를 꿈꿀 텐데 싱크탱크 쪽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적극 지원하려 하고 있다.
인재 확보 위한 선순환 구조 확립해야
홍일표
한국의 경우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싱크탱크 전체로 보면 미약한 측면이 있고 국책연구기관보다 대학을 선호하는 기류가 여전히 좀 더 강하다. 그렇다 보니 정책연구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수요가 약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태재대학교가 싱크탱크를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길 바란다는 말씀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홍일표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사무총장염재호
태재대학교의 특징 중 하나가 졸업 후에도 장학금을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싱크탱크에 인턴으로 간다고 하면 생활면에서 힘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원이 필요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오랜 기간 싱크탱크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많이 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 예비내각)’이라 해서 중요한 정책들에 대한 점검이 사전에 이뤄지는데 우리나라는 대선 때만 되면 단기간에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공약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반복된다. 독일도 각 정당마다 뛰어난 싱크탱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이 미흡하다. 결국 소프트 파워 측면의 생태계가 중요한데 아직 그런 부분에 대한 투자가 약하다. 특히 인문사회 분야의 경우 5년, 10년 길게 보는 연구 지원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1년 단위로 돌아가고 연구를 하려는 사람들도 줄어드는 추세다. 싱크탱크와 인재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연구자들이 꾸준히 공부하고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홍일표
최근 정부의 R&D 예산이 크게 줄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계와 액수는 비교도 안 되지만 경제·인문사회 분야도 많이 줄었다. 한편으로 ‘예산이 줄지 않고 변함없이 나아간다면 과연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다. 연구회가 출범한 지 25년이 됐는데 애초의 출범 취지와 미션을 고려하면 그만큼 효과가 있었는지, 현 체제가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게 된다. 국책연구기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며, 좋은 인재를 모으고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하다.
염재호
우리나라의 R&D, 특히 과학기술 분야를 보면 곧 제품이 나올 만한 기술 분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부분은 기업이 훨씬 더 잘한다. 국가 R&D는 기초연구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자문위원도 한 바 있지만 소수의 잘하는 사람에게 연구비를 밀어줄 것이 아니라 기초연구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기초과학연구원의 한 해 예산 정도면 전국 우수 10개 대학의 상당수 이과계열 학생들에게 등록금 지원을 해줄 수 있다. 국책연구기관들도 매번 비슷하게 주장을 늘어놓는 포지션 페이퍼(position paper)를 낼 게 아니라 기초연구를 통해 데이터를 축적해두면 그 자체로 큰 힘이 될 텐데 그런 점이 미흡하지 않나 싶다. 연구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연구 현장 종사자들의 처우는 용역 노동자, 프로젝트 노동자 수준으로 열악한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필요하다면 용역 프로젝트 위주로 하는 기관을 따로 두더라도 스스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문학적인 연구소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예전에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 유학을 갔을 때, 스탠퍼드대학교 출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이 교수를 그만두고 대표적인 민간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에 간다고 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학교에 잡일이 많아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얘기했다. 우리도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지역대학들은 사라지는 추세이고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은 미달인 곳이 많다.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 학문·지식 생태계의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싱크탱크가 인재를 흡수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재를 용역 노동자화하지 않고 연구자가 주체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싱크탱크의 역할
홍일표
문제는 인재 양성과 확보 문제를 정부나 국책연구기관 차원에서만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내 정책지식 생태계의 현실을 보면 시민단체형 싱크탱크의 역할은 미약하고, 기존의 기업 연구소들도 인하우스 역할에 집중하게 되면서 과거 대비 크게 약화됐다. 그런 가운데 최근 최종현학술원이나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아산정책연구원 등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국의 정책지식 생태계에서 이러한 기관들의 시도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시는지, 국책연구기관들과 어떤 식의 협업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보시는지 제언 부탁드린다.
염재호
기업들이 이익 창출에 전념하느라 상대적으로 기업연구소를 통해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된 것 같다.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도 그 역할을 계속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무척 안타깝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도 25주년을 맞았으니 앞으로 부처에 종속되는 체제보다는 중장기 연구를 하는 파트의 비중을 절반 이상 두고 나머지는 부처를 지원하는 식으로 방향 설정을 하는 편이 어떨까 싶다. 민간 부문에서도 싱크탱크의 역량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싱크탱크가 중요한 이유는 사회문제에 대한 정책 디자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워낙 즉흥적으로 빨리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제대로 문제 해결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19 사태 때 영세 상인들이 타격을 많이 받았는데 정부에선 전체 국민에게 지원금을 나눠줬다. 그랬더니 젊은 층은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캐나다의 경우 영세 상인들이 전년도에 낸 세금을 바탕으로 매출을 역산해 이를 지원해줬다. 우리보다 예산을 적게 쓰고도 큰 효과를 본 것이다. 즉 싱크탱크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그에 대해 조사하고 보고서 쓰는 데 집중할 게 아니라 창의적인 정책을 디자인하고 장기적인 연구를 하는 데 열중해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국제 정세에 따라 세계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위기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연구해야지, 남이 했던 연구를 카피해 보고서를 만드는 데 그쳐선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싱크탱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싱크탱크가 인재들이 가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곳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홍일표
국책연구기관의 경우 재정적인 어려움을 넘어 연구 역량을 펼치는 데 있어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한계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염재호
한국처럼 빨리 성장한 나라는 지속해서 리디자인(redesign)을 해나가야 하는데 관성 때문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같은 상위 조직들이 싱크탱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면서 새롭게 혁신해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특히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카르텔’ 논란이 불거지는 이때 변화의 가능성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정부의 투자가 항상 100%의 효율을 낼 순 없다. 30% 정도는 노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느 정도 참아주면서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유연하게 운영해야지 지나치게 관료적으로 운영하려 해선 안 된다.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됐고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가 많은 만큼 정부 R&D 측면의 리디자인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인재 양성 위한 교육 패러다임 전환 앞장설 것
홍일표
싱크탱크, 특히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려면 무엇보다 그에 걸맞은 인재의 발굴, 육성, 지원, 활용이 가장 중요하다. 태재대학교에서 초빙한 교수들에 대해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로서 역할을 주문하고 기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일반 대학과 달리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수들을 초빙할 만큼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 이뤄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염재호
우리 연구기관들의 문제점 중 하나가 관료화로 인해 운영이 경직돼 있다는 점이다. 연구·운영비도 묶음예산(lump-sum)으로 지원하면 좋겠지만 대개 항목이 정해져 있어 자체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태재대학교는 예산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쓰고 싶은 분야에 예산을 집중하면 효과가 높게 나타나고 큰돈이 아니어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태재대학교 도서관의 경우 모든 책이 전자책(e-book)인 디지털 라이브러리로 운영된다. 일반 대학 예산의 50분의 1만으로도 도서관의 효율적 운영이 가능하다. 물리적인 책을 구입해 정리하고, 빌려주고, 반납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이런 식으로 효율성의 측면을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인재 양성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100 정도 되는 학생들을 110이 되게 하는 방식과 70 정도 수준의 학생을 200으로 만들어주는 방식을 놓고 보면 굉장히 다른 얘기다. 태재대학교에는 학생들에게 맞춤형 지원을 하는 전문 지원 조직이 많다.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면 300퍼센트 정도 성장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인재 양성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또한 우리가 만들려는 모델을 통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싱크탱크도 차별화 지점을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하면 분명히 바뀔 점들이 많을 텐데 그런 시도를 잘 안 한다. 세상이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고, 이러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유연하고 효율적인 조직들이 많이 나와 경직된 구조에 균열을 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소수의 사람이 기존의 대학을 흔들고 바꾸려 하면 저항에 부딪히기 쉽다. 반면 태재대학교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서 여러 실험을 할 수 있는 만큼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는 전환점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홍일표
앞으로 4년 후에는 첫 졸업생이 나올 텐데 그 학생들이 어떤 분야를 가든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또한 태재대학교의 실험과 도전이 사회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려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된다. 이와 함께 인재 육성을 위한 싱크탱크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신 것 같다.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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