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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합의가 우선인 ‘묻지마 범죄’ 범죄정보시스템 마련 필요
김지선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범죄예방·교정정책연구실 선임연구위원 2023 가을호2023년 범죄와 관련된 사회이슈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을 꼽는다면, 단연 신림역과 분당 서현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과 온라인 사이트에 모방범죄를 암시하는 범죄예고 글 게시 사태일 것이다. ‘묻지마 범죄’는 2000년 한 언론보도에 등장한 이후 널리 사용된 개념으로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다. 학계는 언론에서 사용하는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안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용어는 지칭되는 범죄의 특성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하는 반면에 범죄대상인 피해자가 아무런 잘못 없이,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어디서나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만 부각하여 시민의 두려움을 극대화하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후 학계에서 무동기 범죄, 이상동기 범죄, 분노 범죄, 무차별 범죄 등 다양한 개념이 제시되었으나 현재까지 범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용어와 개념을 정의할 때 포함되어야 할 기준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학계뿐 아니라 형사사법기관 간에도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2012년 의정부역 흉기 난동 사건을 시작으로 이후 세 건의 흉기 난동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며 ‘묻지마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대검찰청과 경찰청은 별도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검찰청은 불특정한 피해자 선택 방식을 강조하는 ‘묻지마 범죄’를, 경찰청은 범죄자의 정신적 문제로 인한 동기를 강조하는 ‘이상동기 범죄’를 문제가 되는 범죄현상을 지칭하는 공식용어로 채택하였다. 용어 선택과 그 용어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 범죄자, 형사정책을 이해하는 관점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두 형사사법기관 간 차이는 해소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지난 8월 국무총리가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발표된 ‘묻지마 범죄 관리감독 대책’에는 혼란을 겪고 있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용어 정의가 누락되어, 여러 부처가 공통된 범죄현상을 상정하고 대책을 협의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개념에 대한 합의 부재로 정확한 실태 파악 어려워
더욱 우려스러운 현실은 2012년 여의도 칼부림 사건, 2016년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사건, 2019년 진주 아파트 방화사건 등 세 차례 이상의 ‘묻지마 범죄’ 파동을 겪었다는 점이다. 대책 마련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실태 파악을 통해 관련 형사정책을 수립해야 할 책무가 있는 형사사법기관에서 관련 통계자료 축적을 위한 체계적 노력은 미흡하기만 했다.
경찰과 검찰은 동일한 범죄통계원표에 의거해 수집된 범죄의 발생 및 처리에 관한 공식범죄통계를 매년 공표하고 있으며, 이는 범죄 발생 추세의 분석 및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공식범죄통계는 법률적 범죄개념에 근거한 범죄분류방식에 기초해 자료가 수집되기 때문에 법률적 개념이 아닌 ‘묻지마 범죄’의 실태파악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3년 대검찰청은 자체적으로 개념 정의한 ‘묻지마 범죄’에 부합하는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재판기록을 전국 각 청으로부터 수집한 후 자료분석 결과를 공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검찰청의 ‘묻지마 범죄’ 관련 통계자료 수집 및 분석결과에 대한 공표는 2017년 이후 중단되었다. 한편 경찰청은 2022년 1월 ‘이상동기 범죄’를 공식용어로 명명하고 관련 특별팀 구성, 관련 범죄분석 및 통계수집, 대응책 마련 등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으나 이러한 계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 한 해에 ‘묻지마 범죄’가 몇 건 발생했는지, 이전에 비해 증가 혹은 감소하고 있는지 등 간단한 현황 분석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도 미비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회적 관심에 비해 부족한 정책연구
형사사법기관에서의 정확한 개념 정의 부재와 관련 통계자료 축적 미비는 정책연구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묻지마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비교해볼 때 실증자료에 근거한 정책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12년 이후 실증자료에 근거한 몇 개의 정책연구가 수행되었으나 이마저도 대부분 대검찰청이 자체적으로 정의한 ‘묻지마 범죄’를 기준으로 분류·활용한 연구들이며, 대검찰청이 자료 수집을 중단한 2017년 이후 관련 정책연구도 전무하다. 최근 발생한 신림역과 분당 서현역 사건 이후 대책 모색을 위한 다수의 세미나 및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나 인용되거나 활용된 유일한 실증자료는 10년 전인 2013년에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수행한 정책연구 결과였다는 점은 관련 통계자료 부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묻지마 범죄에 대한 대책이 기존의 대책과 대동소이하고 이상동기, 묻지마 등 범죄동기의 이상성이나 범죄자의 비합리성을 전제하면서도 합리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한 셉테드(CPTED) 전략이나 다중밀집장소에 경찰특공대를 배치하는 가시적 위력순찰과 같이 다소 모순적인 대책이 제시되고 있는 것도 근본적으로 증거에 기반한 형사정책수립을 위한 기반조성이 되어 있지 않은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범죄정보시스템의 마련 필요
향후 ‘묻지마 범죄’에 대한 사건 및 사례를 수집, 유형을 분류하고 분석하기 위한 분석틀과 함께 범죄정보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합의된 개념 정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범죄정보시스템 구축 및 활용, 그리고 정책연구 목적의 데이터 공개에 관련된 법적 근거도 함께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구체적인 입법 방안으로는 미국의 「증오범죄통계법」을 벤치마킹해 2016년 이종걸 국회의원이 발의한 「증오범죄 통계법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법안은 형사사법기관이 증오범죄 통계 관리를 통해 연구기반을 조성하고 향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의되었으며 증오범죄의 정의, 국가의 통계조사관련 시책 추진 의무, 수사기관의 통계원표 작성 및 자료 집계 관리 의무, 법무부장관의 증오범죄 통계지 발간 의무, 법무부장관의 학술연구 목적의 통계자료 제공이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개선을 통해 사회적 여론, 기존의 범죄대책 수립과정에서 답습해온 방식의 고수, 관련 이익단체의 다소 편파적 주장이 아닌 증거에 기반하여 ‘묻지마 범죄’ 대책이 수립되고, 지속적인 정책성과 분석 및 피드백을 통해 정책의 효과성 및 효율성을 제고하는 환경이 구축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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