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해접근법(all hazards approach)
재난을 예측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정부는 각종 재난을 예측하고 예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재난은 끊임없이 발생해왔고, 모든 재난을 예측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정부는 예전에도,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재난 발생의 원인 중심의 정의와 관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른 재난 정의를 살펴보면 재난을 크게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구분하고 자연재난은 태풍, 홍수, 강풍 등 자연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그리고 사회재난은 화재, 붕괴, 폭발, 교통사고 등 인간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재난 정의 방식은 일본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여 재난의 발생 원인 중심으로 각 재난을 예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영국 등에서 취하고 있는 포괄적 재난 정의(환경과 인간에게 주는 모든 피해와 전쟁, 테러 등)와 달리 재난의 종류에 따른 대응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재난의 등장과 원인
실제로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 조직도를 보면 자연재난실과 사회재난실이 구분되어 있고, 실마다 각종 재난대응과를 배치하여 업무 분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과 일본처럼 관료제가 강한 국가가 채택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료제는 관료들의 분업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이를 계층화된 구조로 유지하곤 한다. 이는 재난 대부분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발생하고, 각 재난에 대해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자연재난은 국가의 지원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사회재난은 누군가 원인 제공자가 있으므로 그들이 보상 혹은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전제는 무너지고 있다. 먼저 재난은 대부분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기후변화의 속도가 심화되고 기술 발전에 따른 초연결 사회에서는 이전까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재난들이 발생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기존 재난대응의 한계(방재 성능 목표 등)를 뛰어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와 같이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재난이 우리를 덮칠 수도 있다. 초연결 사회가 가진 위험성은 2022년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카카오 먹통 사건, 2018년 아현동 통신구 화재로 인한 KT 인터넷 마비 사태 등에서 잘 드러났다.
재난을 누가 발생시켰는지 가리는 일도 쉽지 않다. 2017년 포항지진 사례를 보자. 포항지열발전소 실험에 따라 인간의 행위가 지진을 촉발(trigger)했다는 것이 공식조사에서 판명 되었고 지진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재난일 수가 없었다. 최근 빈발하는 집중호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류가 기후변화를 일으켰고 그 영향이 재난으로 나타난다면 이를 단순히 자연재난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한가? 더구나 잘못된 도시계획, 잘못된 재난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면 과연 자연재난, 사회재난을 구분하고 원인 제공자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부 기능에 집중하는 전재해접근법
그결국 모든 재난은 그냥 재난으로 포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전재해접근법(all hazards approach)’에 따른 기능 중심 대응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재난의 불확실성과 환경 변화에 주목한 결과이다. 전재해접근은 재난별 대응(agent specific)이 아니라 범재난대응(agent generic)을 강조한다. 즉 재난 발생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정부 기능은 대부분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홍수가 발생하든, 화재가 발생하든 간에 정부가 해야 하는 기능은 유사하다. 실종자를 수색하고, 피해자를 구조하고, 재난 현장 진압 및 응급 복구를 해야 하며, 주민들이 위험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각종 구호서비스를 제공한다. 전재해접근은 이처럼 어떠한 재난이든 간에 정부 기능이 유사함을 강조하고 각 기능을 발전시키고 전문화할 것을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를 비상 지원 기능(emergency support function)으로 정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하 재난안전법)」 제34조의4(기능별 재난대응 활동계획의 작성·활용)에서 관련 13개의 기능을 제시하고 있지만 활용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난 안전법」에 따른 재난 정의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2004년 제정 당시 자연재난은 태풍, 홍수 등 10개에 불과했지만, 폭염, 한파, 화산활동 등 새로운 재난이 꾸준히 추가되면서 현재는 17개까지 늘어났다. 사회재난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최근에는 미세먼지까지 사회재난에 추가되었다. 최근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인파 사고 등도 재난에 추가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재난 안전법」은 제정 이래 무려 56차례나 개정이 되었는데, 이는 예측하기 어려운 재난의 특성으로 재난 정의 및 기능이 꾸준히 개정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법을 땜질해가며 임기응변식 대응을 해야 할지는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재난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재난을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재난 이후 필요한 기능에 집중하여 정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행정부가 범정부 재난대응의 종합 컨트롤 타워일 수는 있지만, 모든 재난 위험의 예방과 대비까지 총괄하기에는 각 분야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 행정안전부가 원자력발전소 안전의 다양한 요소를 이해하고 예방대책을 세울 수 있는가? 혹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예방을 담당할 수 있는가? 각종 산업안전 분야는 어떠한가? 안전의 각 분야는 이미 각 전문부처가 관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각 분야에서 만약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 그리고 그 재난이 범정부적 대응이 필요할 정도로 큰 경우에 컨트롤 타워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재난 발생 이후 정부의 대응 기능에 집중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사회재난대응 분야의 조직을 키우고 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대형재난 발생 이후 당연한 조치일 수 있으나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가안전시스템개편 종합대책’을 통해 사전 예측을 강조하며 사회재난 부분의 역량 강화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전재해접근법의 관점에서는 재난을 구분하여 예측하고 재난별 조직을 만들어나가는 방안은 변화하는 미래 시대에 적합한 방향이 아닐 수 있다. 재난을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재난 이후 필요한 기능에 중심을 둔 재난관리체계로의 점진적 변화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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