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책지식 생태계' 탐구 - 영국 현장에서 얻은 성찰 -
AI 시대, 증거기반 예·결산과 정책연구 거버넌스의 재구성
2025년 여름,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영국의 정부기관 및 싱크탱크를 방문하였다. 단순한 사례 탐방을 넘어 한국의 국가정책 연구체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하려는 시도였다. 인공지능(AI)의 확산은 연구방법론과 증거생산 방식을 바꾸고 있고, 국회-정부-연구기관 사이의 협업은 더욱 긴밀해질 것을 요구받고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말했듯 제도는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속에서 재구성되는 질서다. 연구회 또한 26개 소관 연구기관의 약 5천억 원 규모의 예산과 사업계획을 심의·조정하는 법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빠른 변화 속에서 이를 한층 더 고도화할 방안을 모색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전주기적 예·결산 관리 제도(ETF)
영국은 오랜 기간 정책사업의 전 과정을 관리하는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재무부(HM Treasury)는 국가재정을 총괄하고 총리실(Cabinet Office)은 정부 전반의 정책 집행을 조정한다. 두 기관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며 국가정책사업의 기획-예산-집행-결산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특히 총리실·재무부 공동 산하의 ETF(Evaluation Task Force)는 주요 공공사업의 성과관리와 결산 환류를 제도화했다. 2025년 현재 영국정부 대형사업 포트폴리오를 대상으로 250여 개의 대형사업의 성과·결산 체계를 전수 점검하고, 1,600건 이상의 사업결과를 등록·공유하는 평가 등록부(Evaluation Registry)를 구축했다. 또한 사업집행지침(Teal Book)과 사업타당성·성과관리지침(Green Book)을 통해 예산-결산 전 주기의 관리 표준을 확립해 오고 있다. 이는 한국의 사업계획-예산-결산 환류체계를 정량적으로 고도화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대형사업 집행역량과 리스크 관리(NISTA)
국가인프라혁신청(NISTA)은 대규모 인프라사업의 타당성-재원-리스크-집행 실적을 포괄적으로 점검한다. 또한 정부 전반의 ‘정책 집행 역량(Project Delivery Function)’을 성숙도 모델로 진단하고 보완한다. AI 기반 예측분석과 정부 프로젝트 아카데미(Government Project Academy)를 통한 실무자 역량 강화가 정례화되어 2024년 기준 약 1,300명이 사업관리·윤리 교육을 수료했으며, 결산자료를 반영한 65건 심의 중 28건은 감액, 9건은 원점 재검토되어 약 10%의 예산 절감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는 단순한 효율 제고를 넘어 공적 재원 활용 측면에서 예측가능성과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윤리적 시사점을 던진다.
지난 7월 영국 국가인프라혁신청(NISTA)과 한국 경제·인문사회연구회(NRC) 회의
AI/데이터 시대의 정책연구와 연구윤리(ESRC)
영국의 정책·연구기관들은 AI를 단순한 효율성 도구로 보지 않는다. 데이터 거버넌스, 연구윤리, 연구자 역량 강화를 통합적으로 운영하면서 공공적 책임을 담보한다. 영국 경제사회연구회(ESRC)는 책임 있는 혁신 원칙을 과제 전반에 적용하고, AI 활용 시 데이터 출처의 투명성과 알고리즘 설명가능성을 요구한다. 이는 연구가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 최소한의 조건임을 환기한다. 영국 데이터 서비스(UK Data Service)는 매년 수만 건의 데이터셋을 표준화해 연구자와 정부가 중복 과제를 조기 식별하도록 돕는다. 이는 연간 2천여 건 규모의 소관 연구기관 사업계획 심의를 진행하고 있는 연구회에도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인다.
독립성과 재원다각화의 효율성(NIESR)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싱크탱크로, 거시경제와 노동·사회정책 분석에서 국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다원적 재원구조(정부·국제기구·민간 기여금 및 자체수입)를 통해 연구독립성을 지탱하는 운영모델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은 정부·의회의 정책화와 입법화로 이어져 성과가 다음 재원 배분을 견인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는 ‘공공정책 연구에 대한 재원 심의·편성 결정은 정치인이 아닌 연구자나 독립적 연구기구가 주도해야 한다’는 ‘홀데인 원칙‘이 현대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교훈은 단순하다. 연구 자율성과 공공성 책무는 언제나 긴장 속의 균형이라는 것이다. 이 균형이 보장될 때, 연구는 제도적 한계를 넘어 사회적 파급력을 갖게 된다.
입법부정책연구와의 연결고리(POST)
영국 의회 과학기술처(POST)는 의원에게 근거 기반 정보를 제공한다. POST가 발행하는 POSTnotes와 POSTbriefs는 간결한 표준 브리프로, 입법기구의 의사결정에 즉시 활용된다. ESRC-POST-정부부처의 정책 펠로우십(Policy Fellowship)은 연구자가 6~12개월 의회사무국 또는 상임위에 상주해 현안을 직접 다루게 하며, 2024년 기준 POSTnote 15건 기여, 이 중 5건이 상임위원회·정부부처에 직접 인용되는 실적을 내기도 했다. 이는 정책연구가 보고서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의 의사결정과 맞닿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공공지식이 됨을 보여준다.
맺으며
영국 현장에서 얻은 시사점은 한국 정책연구 체제가 예·결산 기능을 데이터와 정량실적 중심으로 고도화하고, AI윤리·연구독립성·정책화/입법 지원을 병행해야 함을 보여준다. 제도는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질서다. 연구회는 실천자이자 조정자로서 오랜 기간 제도를 설계해 왔고, AI 대전환기에 맞춰 투명성·책임성·효율성 기반의 거버넌스 고도화를 준비 중이다. 증거기반 예·결산, AI와 윤리의 병행, 국회-연구기관 협력의 정교화, 연구독립성과 공공성의 균형은 그 여정의 핵심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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