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분쟁은 우리에게 익숙한 질문을 다시금 서늘하게 던진다. 자원 없는 한국은 위기발생 시 에너지나 식량과 같은 필수 원자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자유무역에 기반한 효율적 국제 공급망은 이제 당연한 전제가 아니다
과거의 국제 물류망은 비용을 낮추기 위해 고효율 운송 경로와 소수의 해상 초크포인트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최근 노드스트림 해저 가스관 폭파,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에 따른 희망봉 우회, 호르무즈 해협 통항 불안 등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저비용 드론·기뢰·순항미사일 같은 비대칭 공격 수단이 확산되면서, 국지적 공격만으로도 공급망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급망 불안정은 더 이상 일시적 충 격이 아니며, 세계 경제가 감수해야 할 구조적 리스크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이후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대를 넘나들었다. 우리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카자흐스탄·오 만 등과의 협의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경로로 연말까지 원유 2억 7,300만 배럴과 나프타 210만 톤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산유국인 미국·호주에서도 휘발유 가격 급등과 주유소 품절이 나타난 가운데, 원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우선적으로 물량 을 확보할 수 있었는가.
분쟁 시기별 국제유가 추이 (브렌트유 기준)

자립화만으로는 경제안보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공급망 관리 수단으로는 수입선 다변화와 전략적 비축, 국내 직접 생산을 통한 자립화가 주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경험은 경제안보에서 자립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위기 때 필수자원을 순수출하는 협력국이 누구에게 먼저 공급할지 판단하는 데 있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제조생산 역량을 한국이 반 대급부로 가지고 있느냐가 결정적이었다. 이번 중동 사태에서는 석유정제와 방위산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 라의 양산형 제조역량이 원자재 협상력의 기반으로 작동했다. 한 국은 하루 약 340만 배럴 규모의 정제능력과 함께 중동산 중질유 를 휘발유·경유·항공유·나프타 등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으로 전환 하는 고도화 설비와 운영 역량을 갖추고 있다. 대한석유협회에 따 르면, 한국의 석유제품 수출 국가별 비중은 호주 16.8%, 싱가포르 13.6%, 일본 11.3%, 미국 10.2%로 주요 우방국 다수가 한국의 정 제 공급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반대로 호주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보유한 자원 부국이지만, 수익 성 악화를 이유로 정유소 8기 가운데 6기를 폐쇄했고 자국 연료 수 요의 약 90%를 해외 정제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이란 분쟁 이후 호주에서는 휘발유·경유 가격 급등과 주유소 품절이 발생했 고, 호주정부는 한국에 수출제한 재검토를 공식 요청했다. 미국석 유협회 자료에 따르면, 셰일가스 등 원유 생산국인 미국 또한 항공 유 수입의 71%가 한국산이며, 특히 서부지역은 그 비중이 약 85% 로 높다. 미국과 일본 또한 항공유 수출제한 자제 의견을 우리 정부 에 전달했다. 이는 자원 생산국이 경제안보에 유리하다는 자립화 통념을 흔드는 사례다. 과거 가격효율성 논리로 제조역량을 포기한 결과, 자원을 가진 나라가 자원을 가공할 수 있는 나라에 의존하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식량위기에서도 유사한 원리가 확인되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에 따르면 2022년 우크 라이나와 인도 등 32개국이 77건의 식량 및 비료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를 취했다. 식량 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는 외화와 다변화된 수입선을 확보하고 있어 가격 상승 수준에서 충격을 흡수한 반면, 파키스탄·아르헨티나 등 식량 수출 국가에서는 기후재난, 외환 부 족, 비료 가격 상승이 겹치면서 식량 위기를 겪었다. 방산 또한 산유국이 위기 국면에서 시급히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물 자를 우리가 공급할 수 있었던 분야였다. 2026년 3월 아랍에미리 트 영공으로 이란발 드론과 탄도미사일이 대거 날아들었을 때, 현 지에 배치된 천궁-II는 90%를 넘는 요격 성공률로 한국 방공 시스 템의 실전 성능을 입증했다. 사우디는 4월 한국에 5천만 배럴 긴급 공급과 연말까지 2억 배럴의 우선 배정을 확약했고, 카타르 국왕은 ‘한국이 최우선’임을 직접 명시했다. 우리 정부는 한국이 부동의 1 위 원유 수입국이자 정제 파트너인 점을 우선 배정 이유로 설명했 지만, 민간에서는 한국 방공 시스템 도입에 대한 답례를 한 것이라 는 해석이 우세하다.
양산 제조능력, 지켜야 할 국가 자산
정제 설비와 방공 시스템은 기술 자체로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대 규모 고도화 설비를 지속 운영하면서 물량·품질·납기를 동시에 충 족하는 우방국은 소수이며, 한국 제조역량의 전략적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이번에는 정제와 방산이 중요했다. 다음 위기에서는 조선·해 양플랜트, 반도체, 건설, 기계·전력장비, 배터리, 콘텐츠가 협력국과 의 거래를 우선적으로 성사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특정 품목을 사전에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때 상대국 이 필요로 하는 것을 실제로 공급할 수 있는 양산형 제조역량의 폭 과 깊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양산 역량은 한 번 잃으면 되돌리기 어렵다. 10여 년 전 석유정제 업에서도 탄소중립과 수요 정체를 이유로 감산이 불가피하다는 논 의가 반복됐지만, 우리나라는 호주처럼 정유소를 폐쇄하거나 일본 처럼 노후 설비를 대폭 축소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정제 역량 을 유지한 선택의 가치는 당시의 가격 지표나 수요 전망으로는 평 가되기 어려웠지만, 이번 위기에서 국가협상력으로 드러났다. 메모 리 반도체도 유사하다. 1990년대 중반 다수 기업이 경쟁하던 세계 D램 시장은 두 차례의 가격 경쟁을 거치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차 치킨게임 당시 512MB DDR2 D램 가격은 6.8달러에서 0.5달러까지 폭락했고, 독일 키몬다는 누 적 적자 25억 유로를 견디지 못하고 2009년 파산했으며, 일본 엘 피다는 정부 공적자금 1,300억 엔 투입에도 불구하고 2012년 파 산 후 매각되었다. 이후 독일과 일본은 메모리 양산에서 과거의 지 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교훈은 지금의 철강·석유화학 구조조정 논의와 직접 연결된다. 해외 저가 물량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만으 로 양산 기반을 축소해도 되는가. 노후 설비의 효율화와 고부가 전 환은 필요하지만, 단기 수익성만으로 산업의 전략적 가치를 판단해 서는 안 된다. 철강·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이익이 하락하는 와중에 국내 나프타분해설비(NCC) 270~370만 톤 감축이 본격화되는 흐름은, 해외 저가 소재 조달이 안정적이라는 전제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특수강과 후판은 방산과 조선의 기반이고, 석유화 학 기초유분은 고부가 소재 산업의 출발점이다. 이를 단기 제품 손 익만으로 평가하면, 향후 위기 발생 시 다른 전략산업의 기반까지 약화할 위험이 있다.
자원 없는 나라의 경쟁력은 자원 자립이 아니라, 협력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한국은 모든 것 을 생산할 수 없지만, 세계가 필요로 하는 몇 가지를 압도적으로 잘 만들 수 있다. 그 능력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지정학 리스크 시대 한 국 경제안보의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이번에는 정제와 방산이었 으나, 다음에는 무엇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 경제안보 전략은 이 미 잘 만드는 것을 계속 잘 만들 수 있게, 제조역량을 지켜나가는 쪽 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필요가 있다.
경제안보 작동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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