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트   국가는 어떠한 이유로 과학과 기술에 투자해야 하는가

기술공화국 재건과 AI 패권의 미래

이미지 이현익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2025 여름호

미-중 패권경쟁이 촉발한 글로벌 기술경쟁은 시장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 온 혁신 생태계에서 국가주권의 부활을 이끌어내고 있다. 기술이, 자원이 무기화된 시대에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보장하는 전략형 R&D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의 초기 혁신은 사소한 소비자 제품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강력한 기술을 산업적·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가장 가치 있는 국방 인공지능(AI) 기업인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Palantir Technologies Inc)’의 창립자 알렉스 카프(Alexander C. Karp)는 최근 저서 『The Technological Republic(기술공화국)』(2025)을 통해 경제·안보에서 교육 개혁, 의료 연구에 이르는 광범위하고 도전적인 국가적 과제들을 포기한채 소비자의 욕망에만 매몰돼 ‘혁신의 사막’이 되어버린 실리콘밸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911테러의 충격으로부터 파생된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는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정부에 성공적으로 조달함으로써 21세기 미국이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 알렉스 카프의 다음 목표는 한때 기술 혁신과 국가 정책의 융합으로 미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기술공화국’ 재건을 향해있다

기업가형 국가의 결함과 붕괴된 기술공화국의 유산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중심으로 형성된 혁신클러스터, 실리콘밸리는 과거 미국 군사 생산과 국가 안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략자산의 생산에 있어 20세기 미국은 ‘기술공화국’으로 군림해 왔다. 하루 1척의 선박, 5분마다 1대의 항공기를 만들어내며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카운티는 미해군의 탄도 미사일 전량을 제조했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설립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1950년대 후반부터 미 중앙정보국(CIA)이 사용한 스파이 위성에 정찰 장비를 납품했고, 인류의 위대한 도약과 더불어 소련과의 우주경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폴로 계획'에 참여해 달 탐사선 유도 컴퓨터의 핵심 칩(Chip)을 공급했다. 이 회사의 반도체 매출 중 80%가 펜타곤을 통한 정부 조달에서 비롯됐으며 이는 인텔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선박에서 이름을 딴 세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USS 노틸러스호를 건조한 ‘일렉트릭 보트’는 해양 패권에 관한 국가적 야망을 실현시켜 주었다. ‘록히드 미사일 앤드스페이스’, ‘웨스팅하우스’, ‘포드 항공우주’,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 등의 기업들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실리콘밸리의 최대 고용주로 성장했으며, 미사일, 군사로켓, 정찰위성 등 전략물자 개발과 생산에 전념했다.

기술공화국의 혁신이 개인의 욕구와 필요에 집중된 소비자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면서 ‘기업가형 국가’를 탄생시켰다. 혁신 가치의 공동 창조자이자 최초의 투자자인 정부는 ‘애플’과 같은 테크 기업이 ‘아이폰’과 같은 소비지향적 제품을 만드는 것을 독려했다. 이는 자본주의 관점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국가의 전략상으로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기업가형 국가의 결함이었다. 미국의 제조업은 빠른 속도로 경쟁력을 잃어갔고, 자국 내 완성형 공급망은 붕괴됐다. 오늘날 미국 내 상장 주식 가치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아마존, 메타, 테슬라와 같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국내총생산(GDP)의 겨우 1.8% 정도 기여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상업적 성공에 도취된 기술 엘리트 기업들은 국가적 프로젝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위협에 대해 감정적으로 옅어졌다. 기술공화국은 분명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무기화된 공급망에 종속된 미국의 국가경영(Statecraft)전략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니었다. 펜타곤이 인도태평양지역과 유럽에서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도입한 제5세대 전투기 F-35의 항공전자 시스템 제조는 분산된 다국적 공급망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대 무기 성능의 핵심인 최첨단 반도체 제조가 미국에서 1만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대만의 한 회사에 종속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중국몽에 맞물려 있는 대만의 지정학적 미래는 미국에게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었다.

미국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제조 경쟁력만이 아니었다. 제조업 가치사슬 경로의 출발점인 원자재 조달은 패권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의심케 할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오늘날 하이테크 제품의 부가가치 대부분은 공학적 기술이 아닌 희소한 자원에서 나온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분업화된 공급망 체계에서 누려온 경제적 효율성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상호의존의 무기화’를 적극 추구했으나, 자원은 본질적으로 기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베이징이 자원의 공급망 우위를 무기로 임의적인 수출 제한을 가하자, 백악관은 적극적인 협상에 나섰다. ‘무기화된 희토류’의 위력은 중국 열세로 보였던 미-중 전략경쟁에서 충분히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전략자원의 과점 공급 체계에 대한 의존도는 방위부터 에너지 안보, AI에 이르는 미국의 국가경영 전략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미 국방부는 F-35 전투기에 400㎏ 이상의 희토류 원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최신예 이지스인 알레이 버크급구축함(DDG-51)은 2,400㎏,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엔 4,200㎏의 희토류가 제조 과정에서 사용된다고 밝혔다. 테슬라 모델3에 탑재된 55.4kWh 용량의 리튬 이온 배터리는 6kg의 리튬(Li), 42kg의 니켈(Ni), 8kg의 코발트(Co), 8kg의 알루미늄(Al), 55kg의 흑연과 17kg의 구리(Cu)로 구성되며, 해당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실리콘(Si) 웨이퍼의 원료인 초고순도 석영조차도 지구상 단 한 곳의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다는 기막힌 현실은 전략자원에 저당잡힌 기술공화국의 암울한 미래를 시사하고 있다.

기술·자원이 무기화된 시대에 국가 과학기술의 전략적 투자가 중요

실리콘밸리를 근거지로 하는 미국의 혁신 생태계는 막연하게 이를 부러워했던 후발주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탄탄하지만은 않았다. 광범위한 상업적 주제에 폭넓게 분산된 미국의 연구개발(R&D) 지출 전략이 정책적으로 집중된 투자를 밀어 붙여온 중국의 국가적 혁신 체제에 기습적인 추격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2025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에 맞춰 보란 듯 공개된 ‘딥시크(DeepSeek)’는 AI 패권을 향한 글로벌 경쟁에서 중국 공산당의 국가적 자산으로 옹호되고 있으며, 화웨이와 SMIC를 필두로 하는 반도체 제조 공급망 자립 시도는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 국무원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저가 수출로 공급과잉을 해소하는 이차전지, 전기차 분야의 ‘붉은 공급망’ 확대 전략은, 어떤 산업이든 마음만 먹으면 절반의 시장은 가져갈 수 있는 중국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전략 경쟁이 각 나라의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시켜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모든 전략기술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전천후 대응은 불가능한 임무다. 현재 우리나라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국가의 전략적 기술개발에 관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첨단 초격차 산업 육성을 담당하며, 대규모 설비투자와 생산 인프라 조성, 특화단지 지정 등을 통해 제조 공급망 전반을 강화하는 한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2대 국가전략기술 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범부처 R&D 전략을 이끌고, 기술로드맵 수립과 연구 현장 지원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산된 국가 전략은 임무 중심의 목표관리와 달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미국과 중국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한정된 자원의 집중 투자를 통해 글로벌 기술공급망에서 결정적 핵심기술(Choke-Point Technology)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부는 국가 전략 기술 개발 추진 체계 및 방향성에 대한 재검토와 더불어 집중된 투자 로드맵 수립을 통해 한정된 정부재원 투입의 전략성을 극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소수의 결정적 핵심기술에 정부 R&D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글로벌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 투자 전략 총괄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는 한편, 해당 조직에 예산배분 및 조정, 집행, 평가 등과 관련한 독립적이고 자율적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실행력을 담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가 경영상의 핵심기술에 관한 정부 투자의 전략성을 제고하고 재원 투입의 효과성을 증진할 수 있으며,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한국의 확실한 조임목을 확보함으로써 경제·안보·혁신 전략의 내실화에 기여할 수 있다. 기술과 자원이 무기화된 시대에 국가는 어떠한 이유로 과학과 기술에 투자해야 하는가.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보장하는 전략형 R&D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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