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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적 산업 환경 변화와 산업정책의 전략적 접근

이미지 이준산업연구원 경영부원장 2025 여름호

美·中 양국과 깊숙하게 얽혀있는 군사·외교·산업·무역 관계뿐만 아니라 어느덧 G7에 근접할 만큼 신장한 우리 국력은 전략경쟁 전장의 조력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역할을 요구받는 역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해답이 있다. 우리가 전략적 선택을 계속해서 요구받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전략경쟁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첩첩산중의 한국산업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로 오른 5월 30일,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 US 스틸이 있는 미국 펜실베니아로부터 우리 철강 산업계를 뒤흔드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3월 발효된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25%의 수입 관세를 50%로 재차 올리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US 스틸 연설’은 정확히 나흘 뒤 그의 전격적인 행정명령 서명을 통해 곧바로 현실화되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철강의 對미국 수출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은 우리 철강 수출의 13%(2024년 기준)를 차지하는 주력 시장이다. 우리 산업화의 상징이자 주역인 철강산업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몰아치고 있는 전환기적 글로벌 산업 지형 재편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생존 싸움을 하는 한국 제조업의 자화상이다. 지난 40여 년간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원천이던 현장 기반의 압도적 제조 경쟁력과 효율성은 현장 숙련 인력의 고령화, 해외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 첨단제조 분야 신규 투자, 전반적인 산업 인프라 노후화 등으로 점차 그 빛이 바래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은 탈(脫)탄소·디지털 전환은 화석연료의 가장 효율적 활용, 현장 암묵지에 기반한 제조 경쟁력 등 그간 우리가 확보한 차별적 경쟁우위 요소의 유효 기한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全 제조업에 걸친 중국發 공급과잉, 예측할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미국發 관세 압박은 美·中 양국에 대한 산업·무역 의존도가 남달리 큰 우리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고 있으며, ‘중국 제조 2025’로 대표되는 중국 첨단산업 굴기와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 간의 전략경쟁은 반도체와 희토류의 상호 전략 무기화를 촉발하며 가뜩이나 비좁은 우리의 경제안보 입지를 더욱 짓 누르고 있다. 이제 중국, 첨단 중간재, 글로벌가치사슬(GVC), 수출 등을 근간으로 형성된 우리 산업의 성장전략은 전면적인 재설계가 불가피해졌다.

본격화된 글로벌 산업 지형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길

현재 글로벌 산업 지형 재편을 추동하는 핵심 동인은 첨단 기술·산업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美·中 전략경쟁이다. 양국 간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가면서 이미 맞대응 전략(Tif-for-Tat) 국면에 접어든 이들 두 나라 간 전략경쟁은 속도, 강도 그리고 성패 여부에 따라 글로벌 산업 지형의 향배를 결정할 것이다. AI로 가속화된 디지털 전환은 이들 두 나라 간 전략경쟁의 시발점이자 경쟁의 끝을 결정하는 핵심 전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탈(脫)탄소 전환은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현 글로벌 제조업 질서의 구심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재편을 위한 신호탄은 이미 던져졌다. 제2차 트럼프發 관세 전쟁과 함께 2030년 1월 1일까지 R&D 비용의 100% 공제 허용과 설비투자의 100% 비용처리가 가능한 보너스 감가 상각제도를 담은 「One Big Beautiful Bill」의 美 하원 통과(5월 22일)는 글로벌 산업 지형 재편을 위한 미국의 반격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다. 어떤 형태로든 현 구조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양국 간 전략경쟁 전장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할지 현재 시점에서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다. 두 국가 간 전략경쟁이 앞으로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 우리는 어려운 선택을 수시로 요구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美·中 양국과 깊숙하게 얽혀있는 군사·외교·산업·무역 관계뿐만 아니라 어느덧 G7에 근접할 만큼 신장한 우리 국력은 전략경쟁 전장의 조력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역할을 요구받는 역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해답이 있다. 우리가 전략적 선택을 계속해서 요구받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전략경쟁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선택을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해야 우리의 산업적 국익이 담보될 수 있다. 그런 지위는 첨단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대체 불가한 위상을 확보해야 얻을 수 있는 자리다. 이런 의미에서 산적한 대내외 난제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산업이 지향해야 할 길은 하나다. 난제를 뚫고 그 자리를 항상 지키는 것이다.

세 개의 린치핀과 산업정책에 대한 전략적 접근

글로벌 산업 지형에서 대체 불가의 전략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개의 린치핀(linchpin)이 필요하다. 첫번째로 첨단전략산업 가치사슬 내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영역의 보유다. 이들 영역의 보유 여부는 가치사슬 내 주도권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특히, 해당 산업의 전략적 가치가 높을수록 린치핀의 가치도 높아진다. 예를 들어 AI 가치사슬 내에서 AI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여기에 더하여 초미세 공정을 통한 반도체 제조가 얼마나 독점적 지위를 가졌는지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대체할 수 없는 첨단생산 입지이다. 입지 자체가 린치핀인 셈인데 첨단전략기술 및 산업에 대한 주요국의 산업정책이 경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첨단 제조 역량과 입지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주요국 간 산업정책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자체적인 기술 및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생산 입지 경쟁력 부재로 대부분의 생산이 해외에서 이루어진다면 주요국 간 전략경쟁국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는 줄어든다. 단적인 예가 미국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반도체 설계 역량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제조 역량은 없다.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안보적 고민이 모두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체적 생산 역량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조 환경은 린치핀의 가치를 가지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는 바로 경쟁력 있는 제조 생태계다. 최근 우리 조선산업에 대한 미국의 지대한 관심에 잘 나타나 있듯이 소·부·장 및 뿌리 산업으로 구성되는 강력한 제조 생태계는 우리 산업 경쟁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린치핀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첨단전략기술·산업 보유와 대체할 수 없는 첨단 생산 입지는 경쟁력 있는 제조 생태계 없이 불가능하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린치핀을 확보하느냐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의 구조적 한계, 한정적인 재정 등으로 우리는 주요국과 같은 규모와 강도로 산업정책을 펼치기 어렵다. 또한 실타래처럼 얽힌 국내 정책 생산 여건으로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도 쉽지 않다. 이는 내부의 에너지만으로 과감하고 실효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외부로부터 오는 에너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다. 지난 5년여간 성공적 산업정책의 성과는 모두 대외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결과이다. 일본 수출규제, 중국發 요소수 대란, 주요국의 경쟁적 첨단전략기술·산업에 대한 산업정책 등으로 고조된 전 국민적 위기 의식을 정책 추진 모멘텀으로 응축함으로써 소부장, 공급망, 첨단전략산업에 대한 획기적인 산업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다. 전례 없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현재에도 이러한 전략적 접근은 유효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추진력을 토대로 린치핀별 현안을 식별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갈수 있는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국가 산업전략 플랫폼이다. 여기에는 민(民)과 관(官), 각 영역에서 생산되는 대내외 민감 산업 정보를 통합 분석·활용할 수 있는 체계와 이를 토대로 전략을 수립·추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거버넌스가 포함된다. 국가 산업전략 플랫폼은 산업도 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앞으로 장기간 펼쳐질 산업정책의 국가 간 무한경쟁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근간이다. 산업정책에 대한 전략적 접근은 여기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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